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동생의 목소리엔 울분이 가득했다.
숨이라도 잘못 쉬면 울컥하고 터져버릴 것 같은 눈물이 목소리를 절제시키고 있었다.
"전화 잘 했어~ 한잔했나?"
"응 선생님도 오시다가 사고 날뻔했데..."
"그런 날은 일찍 집에 들어가야 하는데 "
심심한 대화가 오가는 중에도 나는 동생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귀갓길에 전화할 사람이 <나>뿐이라면
나에게만 이야기할 수 있는 대화가 있을 터이다. 전화기 너머로 동생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어쩜 이렇게 사는 게 팍팍하니? 이젠 좀 괜찮아질 때도 됐는데"
동생은 한숨 섞인 말을 뱉었다. 걸음걸이 때문에 호흡이 고르지 못한 것치곤 무거운 숨이었다.
"세상 일이 마음대로 되나? 세상의 패러다임은 개인 하나가 바꿀 수 없다잖아. 우린 묵묵히 우리가 할 일을 하면서 버티는 거야. 그러다가 적당한 때가 맞으면 그때 버티면서 준비됐던 일들이 풀리기 시작할 거야. 아직 때가 아닐 뿐이야.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
혹여라도 오해의 소지가 생길 것 같은 말은 아닌지 고심하며 천천히 대화를 이어갔다.
"안 좋은 생각이 들면 이겨 내려고 산책을 나가거나 책을 보거나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데 도대체 긍정적인 생각이 잘 안 들어"
동생은 이 말을 하면서 억울하다는 듯 울먹였다. 나도 안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노력하고 있는데도 일이 풀리지 않고 자꾸 꼬여가는 시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마저 나의 인생이고 나의 시간이니 겸허히 받아들이고 나의 역할을 묵묵히 하는 것이 얼마나 기운 빠지고 힘든 일인지 말이다.
막연히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버티라는 위로는 더 이상 동생에겐 죽은 위로라는 판단이 들었다.
대화에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나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바빴다.
'어떤 말이 힘이 될까?'
'정말 필요한 말이 무엇일까?'
바쁜 머릿속에서 나온 말은 대화의 타이밍에 늦으면 안 되듯 떠밀려 입 밖으로 나왔다.
"천천히 가는 거야. 한 번에 되는건 없더라고. 나도 힘들 때가 있었잖아. 빨리 회복하려고 갖은 노력을 했는데 꼬이기만 하고 잘 안되더라고. 너의 시간을 안아줘야 해. 천천히 묵묵히 하루하루 열심히 버티는 거야. 그게 시작이야."
"당장 다음 달 대출금을 내야 하잖아!"
동생이 말투는 다소 신경질적이었다. 나는 숨이 턱 막혔다. 매달 대출금과 생활비에 쫓긴다는 것은 생존의 문제다. 더 이상 나의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완강히 나를 붙잡았다.
문제는 결국 돈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 생각이 더욱 유연해져야 하지만 돈이 없으면 여유를 가질 수가 없다.
가난은 악순환의 고리를 쉽게 끊지 못하게 하는 악랄한 놈이다.
나는 애써 태연한 듯 말했다.
"야! 돈이야 있다 가도 없는 거고 없다 가도 있는 거지. 너 옛날엔 잘 벌었잖아~ 한 번 넘어졌으니깐
다음에 돈 잘 벌면 안 넘어지게 잘 지켜~ 미안한 말이지만 이 시간도 네 인생에 필요한 시간일지 몰라.
네 인생을 길게 보면 지금은 점 하나밖에 안되는 짧은 시간일 뿐이야. 조금 멀리 봐봐. 지나고 나면 다 괜찮아질 거야" 동생에게 꼭 필요한 말을 했다고 자신하진 못했다. 다만 순리대로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면 나보다는 경험이 적은 후배에게 순리를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동생이 대화를 이을 차례였다.
"내 나이면 이뤄 놓아야 하는 것들이 있는데 난 아무것도 이룬 게 없어. 결혼을 한 것도 아니고 혼자 살 거면 부족하진 않게 살아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가 했던 행동과 결정들이 떳떳하지 못하게 됐잖아. "
동생에게도 불혹의 시간이 찾아왔다. 누구나 그쯤의 나이라면 안정적인 삶의 형태를 갖추고 살아가는 나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동생은 그런 말을 하고 있는 듯했다.
"사람이 어떻게 다 똑같니? 잘 됐다가도 휘청할 수 있고 안 되다가도 잘 되는 때를 만나는 거지. 너무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말아 봐. 네가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면 일단 그걸로 당당한 거야. 그다음은 세상이 돌아가면서 너에게 맞는 날이 오는 거지. 너는 우선 이기적으로 살아! 너만 생각하고 네 마음 편한대로 결정하고 그렇게 살아도 다른 사람 피해 안 주면서 살수 있을 정도는 되니깐 이기적으로 살아. 그래도 돼!"
< 불혹 :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었음을 뜻함 >
하지만 동생은 몹시도 흔들리고 있었다. 물론 나도 그 나이에 그랬다. 우리 남매에겐 세상의 빛이 조금 늦게 들어온다고 생각했다. 대신 안 되는 일은 없다고 믿고 전진했을 뿐이다. 동생에게도 그런 희망과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었다.
우리네 작은 사람 하나가 아무리 노력해도 커다란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려울 때도 있다. 시간이 흘러 우리의 노력에 맞는 타이밍이 올 때 그때 딱 맞아떨어지며 좋아질 것이다. 우린 그때까지 묵묵히 역할을 다 해야 한다. 묵묵함에서 오는 막연함으로는 조여오는 하루를 버티기 쉽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안타깝지만 오롯이 스스로 견뎌낼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 운동선수의 코치가 선수들을 지도하고 독려하듯 나는 동생 옆에서 방향을 알려줄 필요가 있고 공허한 마음이 들 때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생은 나의 이야기를 잠잠히 듣다가도 <듣기 좋은 말장난>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돈 있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라는 말을 하기도 하며 자신을 외면한 세상을 실날하게 미워했다. 전화기 너머로 부정적인 말들이 쏟아져 나올 때는 말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지금은 들어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아픔이 클수록 회복도 더딘 법이다. 급하지 않게 천천히 힘을 실어주는 것이 더 현명할 것 같았다.
나의 위로가 같은 말로 반복될 때쯤 동생은 집에 도착했고 이젠 너무 졸리다며 우리의 통화는 끝이 났다.
아마도 뻘겋게 부은 눈에선 열이 났을 테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콧물이 올라와 아픔을 상기시켰을 것이다.
욕실 문을 열었을 때 마주한 거울 속의 스스로를 한심하게 쳐다봤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인생이다. 그 시간도 스스로의 것이다. 그리고 내일 다시 힘차게 사는 것이다.
다행히 동생은 "내일이면 난 괜찮아 질거야!"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믿는다.
우리 남매에겐 어려운 시간을 견뎌내는 끈기가 있고 그것을 낭만으로 해석하는 재주가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