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손편지 좀 쓰시나요?
가장 오래된 소통의 방법을 꼽자면 당연히 편지일 것이다.
연필이나 펜 끝으로 눌러쓴 글씨는 정성스럽다. 틀린 글씨를 지우개로 지우거나 화이트 자국이 생기는 것이
미관상 좋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또한 손편지의 매력이다.
번거로움 속에 진심가득한 사람냄새를 담을 수 있다.
어릴 때는 대전에 사는 외가쪽 사촌들과 편지를 주고 받았다, 초등학교 저학년때부터 4~5학년 때 까지는 틈틈히 편지로 소식을 주고 받았던 것 같다. 별일 없는 사생활을 유치한 글씨로 적어 보내면 3살 많은 누나는 훨씬 반듯한 글씨로 답장을 보내 왔다. 집전화가 있기는 했지만 오히려 편지로 소식을 전하는 날이 더 많았다.
나는 그렇게 편지 쓰는 방법을 배우고 보내는 방법을 알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편지지가 그다지 특별하지는 않았다. 하얀종이에 검은색 가로줄만 덩그러니 있는 볼품 없는 편지지였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서야 문방구에서 일러스트 그림이 들어간 예쁜 편지지를 팔았다
중학교에 입학하자 슬슬 여학생들과 편지를 주고 받는 일들이 잦아졌다.
이미 내게는 글쓰기의 내공이 잠재되어 있었다. 초등학교내내 사촌들과 편지를 썼고 주 1회 한 권씩 책을 읽고 200자 원고지에 독후감을써서 아버지께 제출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도 쓰기 싫었던 독후감쓰기가 빛을 내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내게 연애편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고등학교시절은 편지쓰기의 최고점을 찍은 시기였다. 그 시절에는 교환일기라는 것을 썼는데 사귀는 남학생과 여학생이 편지를 쓰고 전해주면 다음장에 답장을 쓰는 형식의 노트였다. 교환일기는 사귀는 사이만 쓰는 것은 아니었다. 동아리 선후배들도 자주 이용했고 하물며 동성 친구들간에 쓰기도 했다.
남녀공학의 학생들은 맘에드는 이성에게 편지로 고백 하는 일도 잦았다.
교환노트나 편지가 학생부 선생님께 발각되어 신나게 두들겨 맞고 츄리닝바람에 니어커를 끌고 교내 청소를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시내에 있는 커다란 팬시점에서 맘에드는 편지지를 고르는 것도 고교시절 소박한 쇼핑의 하나였다. 예쁜모양으로 편지지를 접는 방법도 있었고 편지지를 대신해 기하학적 모양을 그려서 편지지를 만들기도 했다.
카세트테입을 분해해서 검정 테잎대신 편지를 적은 종이를 말아서 선물하는 여학생들도 있었다. 요즘 세대의 젊은 친구들은 상상도 못할 정성스런 노동으로 마음을 전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책상서랍의 왼쪽은 모두 시집이었고 오른쪽에만 국영수 교과서가 있었다. 창가에 앉아 야간자율학습을 할 때면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며 여자친구에게 편지를 쓰는 일도 많았다.
친구를 대신해 대필도 많이 했다. 같은 학교라 연애 상황을 뻔히 알고 있어서 전하고 싶은 메세지만 받으면
편지 한 장 정도는 어렵지 않게 쓸 수 있었다. 그때는 나름 문학소년으로 통하곤 했다.
군바리들에게 연애편지는 하루를 버티는 희망이다. 훈련병시절 교관들은 초코파이를 먹을 수 있는 기회라며 일요일 종교활동을 권했다. 기독교,불교,천주교 중 선택해야 했다. 기독교인 동기는 불교에서는 초코파이를 2개 더 준다면서 종교를 바꾸기도 했다. 나는 천주교를 선택 했는데 예배를 가는 날은 편지를 부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배부른 돼지 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된 것 같아 후회는 없었다. 자대배치를 받고 군생활을 하는 동안 선배들은 내게 잊지 못 할 별명을 붙여주었다.
나의 연애편지를 훔쳐보던 선임은 "근무중 떠오르는 태양을 보니 수도꼭지에서 물이 쏟아지듯 너에 대한 그리움이 쏟아진다 "라는 내용을 보고 놀리기 시작 한 것이었다. 그리움이 수도꼭지에서 나온다며 예사롭지 않는 표현력으로 중대에서 글 좀 쓰는 군바리로 소문 난 것이다. 결정적인 사건은 휴가 때 기차에서 만난 여자에게 보낸 몇 통의 편지로 교제까지 한 것이 알려지면서 글쓰기로 여자를 꼬시는 놈이라며 <랭보>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 <랭보>라는 캐릭터는 영화 넘버3에서 조폭두목의 와이프에게 시 쓰기를 가르치며 접근하는 인물이다.
원래<랭보>는 프랑스의 여성시인이다. (이런 불미스런 별명으로 사용되게 되어 죄송스럽기도 했다.)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부대를 표현한 <RCN>과 <랭보> 를 붙여 <RCN랭보> 라는 별명이 탄생한 배경이다.
아직까지 인터넷상의 모든 아이디를 <RCN랭보>로 사용할 정도로 심히 내가 애정하는 별명이다.
손편지는 만만하지 않은 정성이 들어간다. 상대가 좋아 할 편지지를 골라야 하고 우표도 준비 해야한다.
지우개자국이나 화이트자국이 염려스러울 때면 연습장에 먼저 쓰고 옮겨 적기도 한다. 아주 번거롭다.
예쁘게 접어야하고 우체통을 찾아 나서야한다. 이런 과정들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을 때도 있다.
오메 가메 편지지도 사고 우표를 사기도 한다. 그 시간 동안 한껏 생각하고 그리워한다. 편지를 우체통에 넣고 답장이 올때까지 기다리는 시간마저 상대와 나눠 갖은 것 같다. 지루할 수도 있는 시간을 감내하고 불편한 노동을 하면서도 손편지를 쓰는 것은 진심어린 내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고 조금 더 오래 그리움을 잡아두기 위함이다.
<카톡!>이라는 기계음으로 나의 소중하고 진지하고 깊은 감정을 전하기엔 아쉬움이 많다.
나는 내 사랑을 더 오랜시간 그리워 해야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