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담파스타

도망치지 않고 페페론치노를 부술 때까지

by 알담

요즘은 무력한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할 일들이 하루씩 밀릴수록 점점 티끌이 태산이 되어가는데 몸도, 마음도 따라주지 않습니다. 5초의 법칙을 실천하면 인생이 달라진다고 하죠. 고민할 시간을 뇌에게 주기 전에 그냥 우선 몸부터 움직이라는 말입니다. 가령 침대에 누워있다가 공부해야 하는데, 고민하며 뭉개지 말고 생각이 들기 전에 몸을 먼저 일으켜 보라는 거예요. 아니면 우선 눈 딱 감고 5분 만이라도 해보면 습관을 만들기 쉽다고 합니다. 러닝을 해야지 생각만 하지 말고 운동화 끈만 매야지, 하며 작은 행동부터 시작해 보는 거죠. 들을 때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 상황에서 몸을 먼저 움직이는 일이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 인생이 바뀐다고 하는지 알겠어요. 그만큼 어려운 일이니까요. 저 말들도 다 마음이 건강할 때나 쉽지. 이런 볼멘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놓친 루틴들은 어느새 개학 전날 방학 숙제처럼 뭉치고 커져서 따라잡기 버거워집니다. 몸이 마음 같지 않아 그저 계속 누워있기만 하는 순간엔 모든 게 마냥 멀게만 느껴집니다. 이때 타인과 비교하기를 시작하면 그때부터 나락으로 빠져들기 십상이죠. 내가 꿈꾸던 나와 지금의 나의 괴리감 사이에서 길을 잃고 맙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영어로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양사 관계자들 앞에서 목적을 딱 부러지게 어필해야 하는 자리였어요. 처음 해보는 일인데, 하필 이런 늘어지는 시점에 중요한 과제가 생겨버린 거죠. 갑갑함에 막막함이 더해졌더니 그냥 모른 척 도망가고만 싶어졌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미팅 일정을 하루 전에 전달받고 나니, 나를 북돋을 시간도 없더라고요. 우선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발표 당일 새벽에야 일기를 쓰며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레터에서는 솔직하기로 했으니 몇 자 옮겨봅니다.
‘사실 언젠가 꼭 해야 할 일이긴 했다. 어떻게 피하기만 하겠어. 이렇게 좋은 연습할 기회가 생김에 오히려 감사하자. 그리고 나를 믿자. 나 나름 외국에서도 살다 왔는데… 그냥 쫄지 말자. 그거면 돼.’


일기에는 호기롭게 적어 놓고서는 아침에 지하철 출구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갑자기 아프다고 하고 빠지면 어떻게 될까…’ 잠시 고민했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방법은 정면돌파밖에 없었습니다. 청심환을 살까 또 고민하다 그 돈이 아까워서 결국 또 일단 해보기로 했고요.


너무 걱정을 사서 한 값이었는지 미팅은 생각보다 간단했고, 협의도 호의적으로 끝났습니다. 물론 제 프레젠테이션 시간이 없어지진 않았죠. 대본도 없이 하려니 혹시 한 숨이라도 비는 곳이 생길까 봐 상대 반응도 살피지 않고 제 발표만 다다다 쏟아버렸습니다. 그래도 마지막엔 긴장도 입도 풀려서 열심히 대답도 했습니다.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무 말 못 하는 것보단 외운 티 나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웃긴 게, 문득 그 자리가 좀 재미있게 느껴지더라고요.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속으로는 제 스스로가 꽤 대견했습니다.


그렇게 집에 돌아오니까 얼마나 후련하던지요. 동시에 갑자기 매콤한 게 당겨서, 페페론치노를 가득 넣은 파스타가 자연스레 생각났습니다. 평소 페페론치노 넣는 양의 3배는 움켜쥐고 부숴서 올리브오일 위에 흩뿌렸습니다. 토마토를 큐브로 썰어 매운맛을 살짝 중화시켜 주고, 앤초비로 감칠맛을 더하고요. 그렇게 뚝딱 파스타를 만들어서 점심때 미처 못 채운 허기를 허겁지겁 채우자니 비로소 하루가 마무리된 것 같았습니다. 맵기는 꽤나 매워서, 혀 위를 굴러다니는 페페론치노 조각이 따끔거리는 듯했습니다. 그래도 꿋꿋이 다 먹었죠. 그렇게 부담스러운 발표도 꿋꿋이 다 마쳤으니까요.


말하기도 식상하지만 역시 뭐든 직접 부딪혀야 아는 법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갑자기 새벽에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운동을 매일 가는 자기 계발서 같은 일이 당장에 일어나진 않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이런 작은 성취감은 삶을 조금씩 나아가게 하는 것 같습니다. 평소에 잘 쓰지도 않는 페페론치노를 듬뿍 부숴 말아낸 파스타를 한 그릇 다 비우는 성취감 같은 것들이요.





[해당 내용은 담파스타 레터의 일부입니다. 원문은 아래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https://dampasta.stib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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