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담파스타 피드백을 통해 (레터 아래 링크에서 받아보고 있으니 언제든 편하게 보내주세요!) 어떤 레시피나 요리책에서 영감을 받는지 질문을 받았습니다.
사실 이 질문을 보고 잠시 멈칫했습니다. 최근 본 영화를 묻는 질문만큼 익숙한데도, 막상 톺아 보니 먼저 물어본 적은 있어도 정작 저는 단 한 번도 이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거죠. 가감 없이 답을 드리자면, 멋없게도 이렇다 할 저만의 인생 레시피 북은 아직 없습니다. 저 질문을 받은 날부터 어떻게 대답을 할지(그래야 멋들어질지) 고민했는데요, 결국은 솔직하기로 했습니다. 한때는 줄리&줄리아 영화를 보고 나서 하나의 레시피 북을 오롯하게 정복해 보고 싶은 알량한 목표를 품은 적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줄리아 차일드의 그 두꺼운 요리책(국문명은 프랑스 요리의 기술)도 선뜻 제 책장에 모셔두었답니다) 그뿐 아닙니다. 책장의 9할은 전부 요리책인 만큼 요리책은 그저 표지만으로도 제 지갑을 열기 충분했죠. 그리고 그뿐이었습니다. 여기서 이제 그만 스스로 인정하도록 할게요. 저는 요리책이라면 사족을 못 쓰지만 애독가가 아니라 애서가이며, 마지못해 부정하고 싶지만 완벽하게 읽은 레시피 북 하나 꼽지 못하는 용두사미 인간이라는 걸요.
결론을 드렸으니 이제는 변명을 해보겠습니다. 돌이켜 보니 맛은 차치하고서라도 저는 언제나 요리의 비주얼에 영락없이 녹아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진득한 소스, 말갛고 투명한 국물, 인위적일 만큼 강렬한 색감의 반죽, 그리고 그 모든 걸 하나로 아우르는 손… 그런 장면들을 마냥 동경하고 좇다 보니 자연스럽게 저 또한 그런 순간들을 오롯하게 담아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음식만큼 사랑하는 그림으로 사랑하는 음식을 표현하게 되었고요.
그래서 친구의 비트 수프를 보고 그림으로 담은 적이 있습니다. 물감이 떠오르는 짙은 진홍색 수프, 도드라지게 하얀 크림, 벨벳처럼 보드라운 질감이 느껴지는 표면과 빗방울마냥 방울져 올라간 올리브 오일의 조합을 처음 봤을 때의 강렬함은 아직도 꽤 생생합니다.
레시피에 대한 영감을 꼽아보자면, 저는 전문 조리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테면 수박 겉핥기 식으로 떠올리는 편입니다. 수박의 초록색과 검은색 껍질을 보고 바질 페스토와 오징어먹물 파스타 면을 번갈아 접시에 담으면 어떨까? 하는 식이죠. 맛은 그다음 문제입니다. 어디 대단하게 선보일 요리가 아니기 때문에 제 입맛에만 맞추면 그만이거든요.
사실 이런 식이라면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레시피를 엮어낼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비트 수프도 같은 결인데요. 비트 수프를 되직하게 만들어서 파스타 면을 말아버리면 비트 파스타가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수프나 소스를 맛보면서 어울릴 만한 면을 상상해 보는 것도 좋아합니다. 개인적으로 꾸덕한 비트 파스타에는 뚝뚝 떨어지는 질감의 숏파스타가 잘 어우러진다고 생각해요.
감사하게도 제 주변에는 요리를 사랑하는 친구들이 많기 때문에 가끔 친구와 만나 요리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합니다. 작년 늦가을쯤에는 친구와 푸근한 뿌리채소 요리를 잔뜩 해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함께 떠올린 요리 중 하나가 비트 파스타였고요. 오레키에테 면을 넣어서 그릇에 동그랗게 담은 비트 파스타가 찰흙 덩어리처럼 보이는 모습이 재밌었습니다. 폭닥폭닥한 소스의 식감과 뿌리채소에서 깊이 느껴지는 흙 맛, 끝에 은은한 시트러스 산미, 툭툭 얹어 낸 부라타 치즈의 감싸주는 풍미가 아주 조화로운 파스타였습니다.
요즘은 소셜 미디어에서도 다양한 요리를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레스토랑에서 새롭게 맛보는 조합이 있다면 기억해 두었다가 집에서 비슷하게 따라 해 보기도 하고요. 끝까지 읽은 레시피 북은 없지만 이렇게 요리를 만나고 다시 제 방식대로 만들어내는 과정이 마냥 행복하고 즐겁습니다. 이 정도면 그래도 스스로를 음식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되잖아요? 비트 수프에 면을 비벼 보았더니 비트 파스타였고 내 입에만 좋으면 그만인 것처럼요.
[해당 내용은 담파스타 레터의 일부입니다. 원문은 아래에서 확인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