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노트
'여백의 미(美)'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주니어 시절 기획서를 쓰면 장표 그득하게 여러 가지 차트와 다이어그램 그리고 텍스트를 인사이트 삼아 옮겨 적습니다. 그런 장표를 수 십장 작성하기도 하죠. '이만하면 됐어!' 하고는 보고를 합니다. 그럴 때면 너무 내용이 많다. 하고 싶은 얘기를 명료하게 정리하고 보고서 장표에 여백을 두라는 지침을 받곤 했습니다. 때론, 프레젠테이션을 하거나 짧은 구두 보고를 할 때도 머릿속에 그려놓은 시나리오에 따라 랩처럼 쉼 없이, 나만의 속도로 얘길 합니다. 중간에 누군가 "잠깐!" 하고 멈춤 신호를 주기 전까지 무대 위에 힙합가수처럼 속사포를 발사합니다. "잠깐"이라는 신호는 화자와 청자 사이에 여백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삶의 여백이 필요한 것도 이와 같습니다.
여백은 비워놓다는 의미보다는 소화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잠시 호흡을 고르고 정보를 음미하는 것이죠. 나만의 언어와 이해 방식으로 소화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밀도 있는 삶, 경쾌한 속도감으로 희열 넘치는 삶. 우린 대부분 이런 삶의 추구합니다. 속도감이 떨어지면, 삶의 밀도가 낮아지면 왠지 모르게 불안하고 뒤쳐지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계속 템포를 올리고 꾸역꾸역 빈 곳을 찾아 메우죠. 그러다가 불연소 상태로 다 타지도 못한 채 사그라진 장작불 마냥 재도, 숯도 아닌 흉한 몰골이 됩니다.
여백이 필요한 건, 삶을 소화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먹방러도 아니고 푸드파이터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니까요. 여백은 '되돌아보는 시간(회귀)'을 의미합니다. 마치 바둑기사처럼 복기(復棋)하는 이유와 같습니다. 복기를 통해서 교훈(Lessons Learned)을 정리하고 주요 변곡점에서 의사결정의 맥을 한 번 더 되짚어보는 거죠.
여백이 필요하다 하여 일생의 대부분을 여백으로 보내서는 안 됩니다. 소화시킬 게 없는데 되새김을 할 들 무슨 교훈이 있겠습니까. 하여, 여백이 필요한 이는 여백의 시간을 보낼 충분한 자격이 있어야 합니다. 가끔 채용 인터뷰를 하다 보면 '번아웃(Burn out)'이란 핑계를 여러 상황에 대입하여 남발하는 이들을 보곤 합니다. 주로 야근이 그 이유가 되더군요. 물론, 야근을 일상으로 보내고 충분히 생각할 겨를 없이 무지성으로 달리기를 반복하는 경우는 이유가 될 순 없지만 그저 늦게 퇴근해서.. 웨라벨을 즐기지 못하여...라는 이유는 '번아웃'의 사유가 되기에 부족합니다.
가끔 머릿속을 빈틈없이 채운 생각에 불면증에 걸리거나 꿈속에서도 잔상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이럴 때를 대비해서 머릿속 어딘가에 빈 공간을 둡니다. 여백의 시간에는 그 빈 공간을 찾아갑니다. 빈 공간의 경로는 매번 변합니다. 어떤 때는 빈 공간을 찾아 헤매느라 지쳐 잠듭니다. 찾아낸 빈 공간에서 한 동안 여백의 시간을 갖습니다. 말로는 쉽게 썼지만, 실은 오랜 시간 이 연습을 했습니다.
여백은 우리 삶에 자양분이 되기도 합니다. 놓치고 무심코 지나쳤던 소중한 무언가를 과거로부터 찾아와 새로운 자원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때론, 어린 시절 꿈꿨던 공상처럼 상상의 나래를 펼쳐 지금껏 생각지 못했던 기발한 발상이 착상되기도 할 겁니다. 스마트 폰 안에 우리의 여백을 매몰시키지 말기 바랍니다. 여백은 오롯이 우리 머릿속 빈 공간에 있습니다. 그 공간을 찾아가는 여정을 즐겨보길 바랍니다.
- 까칠한 펜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