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가

by 아를

나는 매일 ‘나는 누구인가’를 묻곤 한다.

몸은 가시투성이고 마음은 냉소 그 자체이다.

미니멀라이프를 지향하던 나를 자유가 아닌 사슬에 묶었고, 신앙이 아슬아슬 흔들린다.

회복의 시간조차도 정체를 지워간다.

아스라이 바스러진다. 처절하게도...

어제 엄마가 한약을 다시 먹어보자고 하셨다.

한약은 비급여라 굉장히 비싸다.

엄마에게 너무 버거운 짐 같아서 죄송스럽고 미안해서

마음속 내내 불편했고 힘들었다.

그러나 나도 내가 해도 해도 너무 아프니,

알겠다고 하고 잠을 청하는데 잠은 오지 않았고

엄마에게 문자를 남겼다.

“엄마. 고마워요. 그런데 좀 더 생각해 보고 먹을게요.

신중하면 좋을 거 같아요.”

그러고 수면제를 복용 후 새벽 4시에 겨우 잠이 들었다.

오늘 일어나 보니 우선 목이 너무 아파서 이비인후과에 갔다. 감기란다. 참 면역력이 많이도 약해졌다.

나는 감기에 잘 안 걸리는 사람이었다. 이제는 감기뿐만 아니라 온갖 면역에 관련된 것은 다 걸린다. 염증부터 시작해서 알레르기 등 정말 많다.

매일 같이 아프지만 그것을 견뎌내는 힘이 다 빠졌을 때에는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고 몹시 불안하다.

예기불안이 찾아오고, 스트레스에 자야 한다는 압박감에

누우면 질식할 것 같은 게 찾아온다. 우울증보다는 공황발작이 더 우위에 있는 현재이다. 혈압 또한 수축기혈압이 80대 머물고, 그래서인지 몹시 어지럽고 모든 것이 짜증스럽다. 이번 주에도 주일에 못 나간다면 벌써 한 달째다.. 속상하다. 나도 여느 사람들처럼 지내고 싶은데,, 안된다.

어쨌든 이비인후과에 다녀오고, 근처에 내가 다니는 한의원에 갔다. 왜 갔냐고? 엄마가 아침에 깨워서 한의원부터 가자고 하셨다. 내 마음을 눈치채신 거 같다. 나는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섰다. 나는 몹시 아팠기 때문이다.

가만히만 있으면 가마니가 되니.. 나는 시도하지 않으면 변화는 없다는 생각이 나를 움직이게 한다. 이것이 좋게 적용될 때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독이 된다. 강박과 스트레스, 허무감 말이다.

한의원 선생님은 내가 자살시도 후 집에서 후유증에 시달릴 때 우리 집에 와주셔서 왕진까지 해주셨다.

마음씨가 좋으신 분이다.

나는 먼저 입을 떼었다.

“선생님 저는 왜 이렇게 쇠약한 걸까요?”

“온기님, 온기님이 쇠약한 게 아니에요. 온기님은 지금 몇 년에 걸쳐 아팠고 그게 누적돼서 그래요.

어른들이 열심히 일하시다가 나중에 아프다고 하시는 것도 그런 이유고요. 에너지를 몰아서 너무 많이 끌어다 써서 그래요. 지금은 에너지를 채워야 할 때예요.

맥이 너무 힘이 없어요.

다른 애들은 잘만 지내고 날고 기는데 나만 왜 이러지?

이런 생각하죠? 그러지 마요. 지금은 회복의 시간이에요.”

라고 하셨다.

나는 감사하면서도 나는 언제까지 회복만 해야 하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요즘 들어 냉소적이고 더 회의적이다.

소유나 물건에 대한 시각도 바꾸려고 했다.

나는 미니멀라이프를 실천하고 있다.

환경에 대한 관심은 진심이었으나, 절제를 올바른 동기로 했어야 했다.

플라스틱 줄여보고, 상술에 속지 말고, 그래서 로션도 하나면 되지 않을까 와 가방도 하나만 남기니 편하고

백팩은 사실 여행용으로 남겼다. 갈 수 있을지 모를..

캐리어도 없이 기내용으로만 들고 다닐 생각으로 말이다.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생각이다.

이게 무조건 나쁘진 않지만 내가 다른 것에도 충족되지 않은 허한 상태라 많이 냉소적이고 유품을 미리 정리하듯 구는 거 같아서 단순한 소비 조절이 아니라,

이미 삶의 정리, 생존의 냉소, 상실감의 발현까지 닿아 있는 것 같다.

외출과 활동 감소가 만드는 악순환도 된다.

꾸밀 이유가 없고, 외출이 적으니 감각이 죽고,

감각이 죽으니 자신감도 떨어지고, 자신감이 떨어지니 더 밖에 나가기 싫어지고, 결국 내면도 초라해지는 악순환이 된다.

왜 이런 무의미감이 생길까?

감각 결핍일까..?

꾸미기, 표현, 즐김이 없으니 감정의 색이 흐려진다.

관계와 활력 결핍일까...?

꾸밀 필요 없는 환경 외출 동기 없음 미에 대한 동기 상실로 이어진다.

의미 단절일까...?

미니멀을 해도 내 삶이 나아지는 느낌 없는 것 같다.

“그럼 이게 다 무슨 의미야?”라며

결국, 무의미감이 미니멀 속에 뿌리내린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관계와 미(美)와 남들과 같은 생활을 추구하면, 돈이 든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리고 나에게 지금 돈은 생존과 직결된 유한 자원이다.

그래서 더 아픈 것이고, 더 절박하다.

내 무의식이 이대로 완전히 포기하고 싶다는 전략은 정신적으로 매우 위험한 길일 것이다.

“나는 원하지 않아.”가 아니라

“나는 원하지만, 가질 수 없어.”는 억압이고,

억압은 반드시 무기력, 충동구매, 정체성 혼란으로 돌아온 다. 나는 그것이 두렵다. 양가감정이 생긴다.

억압하지 않고서는 과연 그것이 자연스럽고 누림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 올까? 지금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척’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나는 절벽 위에 서있는 것과 같다.

툭 밀면 떨어지고 조금만 뒷걸음치거나,

잡아당겨주면 안전한 그러한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

몸이 아프면 온 세상이 시커멓다. 때로는 빨갛다.

사람들의 말소리, 냄새, 공기, 습도, 조명, 온도 등

모든 것이 예민하게 다가온다. 내 머리로는

“아니야.. 나는 이걸 원하지 않아!”라고 생각해도

내 몸이 “아니.. 난 누워있고 싶어. 혼자 있고 싶어. 모든 게 두려워. 버거워. ”라며 비명을 지른다.

나는 크리스천이고, 불교의 무소유의 패턴을 반복했던 것 같다. 불교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치관에 부합되지 않는 마음가짐의 행위였던 것이다.

욕망은 죄가 아니라, 주어진 에너지라고 한다.

절제는 욕망을 죽이는 게 아니라, 방향을 정리하는 것..

하나님은 에스더를 통해 미(美)를 쓰셨고,

다윗도 외모가 준수했으며,

성막도 가장 정교하고 아름답게 지으라고 명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모보다 중심을 보신다는 기준을 강조하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래서 욕망이 죄는 아니며,

그것이 정체성의 중심이 되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지금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중이다.

내 몸이 아픔으로 인해 자녀로서의 정체성

사회인으로의 정체성

하나님의 자녀로의 정체성

30대 여자로서의 정체성

나 자신의 가치에 대한 정체성

역할 기능적으로의 정체성

이상적 자아 정체성... 등

정체성의 중심은 “어디에 두느냐”가 중요하다.

성경은 ‘외모, 능력, 돈, 역할’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위에 정체성을 세우라고 말한다.

내가 요즘 느끼는 공허감, 나 자신을 가꾸는 것에 대한 갈등, 소비에 대한 충동, 무가치감은 정체성 부재에서 온다.

어떻게 찾아야 하며 그 여정은 괜찮을지 알 수 없다.

오늘만 생각하리 오늘만 생각하리.........

그 마음 밖에는 내가 나에게 줄 처방이 아직 없다.

너무 힘든 나에게 “힘내”라고 하고 싶진 않다.

힘든 사람한테 힘내라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를 잃지만 말아보자... 그게 오늘 나의 처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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