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호주의 뿌리, 죄수가 시민이 되기까지

#019. [호주] Hyde Park Barracks

by Muse u mad

영국에서 건너온 죄수들로부터 호주가 시작되었다는 점은 모두가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애보리진(Aborigine)의 역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백인들이 호주에 정착하면서 현대의 호주를 만들어 온 시작을 의미한다. 어떤 이유로 영국은 머나먼 호주까지 죄수를 보내는 선택을 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그들이 호주에 다시 정착하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국가 호주의 시작이 영국에서 넘어온 죄수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을 기억하기 위해 유네스코는 총 11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당시 죄수들의 수용소로 사용했던 시드니의 하이드 파크 배럭스(Hyde Park Barracks)이다. 서호주 프리맨틀의 프리맨틀 프리즌(Fremantle Prison), 태즈메이니아의 포트 아서 역사지구(Port Arthur Historical Site) 등도 같은 목적으로 사용되었던 장소이다. 호주의 시작이 죄수이고 현대사에 성장통이 있었지만, 현재 다문화사회로 잘 정착하게 된 계기가 그들 역사의 시작에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Hyde Park Barracks를 방문하였다.



한 줄 요약

✔️ 시드니의 Hyde Park Barracks는 호주의 뿌리인 영국에서 온 죄수들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박물관 개요

✔️ 명칭: Hyde Park Barracks

✔️ 홈페이지: https://mhnsw.au/visit-us/hyde-park-barracks/plan-your-visit/

✔️ 주소: https://maps.app.goo.gl/Bm5CWbpNYE5xsz4i7



영국은 왜 죄수들을 호주로 보냈을까?

18세기 후반 영국은 산업혁명의 본격적인 물결을 맞았다. 농촌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런던과 맨체스터 같은 도시로 몰려들자 인구는 급격히 늘었고, 빈민가가 확산됐다. 생활은 불안정했고, 하루하루 먹을 것을 구하기조차 버거운 이들이 늘어나면서 절도와 범죄도 함께 증가했다. 당시 영국의 법체계는 ‘Bloody Code(피의 법전)’라 불릴 만큼 가혹했다. 200개가 넘는 범죄가 사형에 해당했는데, 지금으로 보면 너무나 사소한 것들도 포함됐다. 나무 한 그루를 허락 없이 베거나, 단돈 1실링, 우리 돈으로 치면 몇 천 원 남짓의 물건을 훔쳐도 사형 선고가 가능했다. 하지만 실제로 모든 범죄자를 교수형에 처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잔혹하다는 비판도 점차 커졌다. 사형을 줄이자니 감옥이 문제였다. 장기형을 받은 죄수들을 수용하기에는 감옥이 부족할 수 없었고, 죄수의 수도 지속적으로 늘어나면서 영국 정부는 다른 방안을 찾아야만 했다.

정부는 급한 대로 낡은 배를 개조해 템스강에 띄워 두고 감옥으로 사용했다. 이른바 감옥선(prison hulks)이었다. 하지만 배 안의 환경은 비위생적이고 위험했으며, 감옥선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만큼 죄수는 넘쳐났다. 영국은 더 이상 본토에서 감당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먼 식민지에 죄수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1776년 미국이 독립하면서 미국으로 보내던 죄수들을 더 이상 보낼 수 없었던 이유도 있었다. 식민기간 동안 약 5-6만 명의 인원이 영국 죄수가 미국으로 이송되었으나 갑자기 중단되면서 영국이 선택한 대안이 바로 호주였다. 영국 정부는 당초 아프리카 또는 카리브해 국가들로 이송하는 방안도 검토하였으나, 모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였고 1785년 영국 정부는 뉴사우스웨일스에 유형지(流刑地)를 건설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788년 첫 번째 죄수 수송선대인 ‘First Fleet’이 시드니에 도착하면서 호주는 죄수 식민지로 역사를 시작했다. 1868년까지 80년 동안 무려 16만 2천 명이 넘는 죄수들이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호주로 이송됐다.

prison ship.png 감옥선 (출처: Museum of History New South Wales 홈페이지)




Hyde Park Barracks에서 죄수들의 삶

1819년 시드니는 Hyde Park Barracks를 세웠다. 설계자는 프랜시스 그린웨이(Francis Greenway)였는데, 흥미롭게도 그는 죄수 출신 건축가였다. 능력을 인정받아 사면된 후 정부의 공공 건축을 맡았고, 이 건물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Hyde Park Barracks는 수백 명의 남성 죄수를 수용하기 위해 지어졌다. 여느 교도소와 마찬가지로, 중앙 복도를 중심으로 양쪽에 방이 배치됐으며 방 안에는 해먹이 줄지어 걸렸다. 좁은 공간에 최대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침대가 아닌 해먹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곳에서 죄수들은 아침이 되면 해먹에서 내려 도시 건설과 도로 포장, 항구 작업 같은 강도 높은 노동에 나섰다. 당시 시드니의 주요 건물과 길 대부분은 죄수들의 손으로 지어졌다. 노동은 혹독했고, 식사는 충분하지 않았으며, 질병이 자주 돌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규율을 어기면 채찍질, 족쇄 착용, 독방 감금 등의 체벌이 기다렸다. 중범죄를 저지르면 포트아서나 노퍽섬과 같은 중노동형 교도소로 이감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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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죄수들이 잠자리로 사용했던 해먹 / (우) 죄수들이 건설 노동시 사용했던 도구들 (출처: Wikimedia Commons)




죄수에서 시민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영국과 호주 모두에서 죄수 이송 제도에 대한 비판이 커졌다. 영국에서는 기독교적 인도주의가 힘을 얻고, 사회개혁 운동이 일어나면서 사소한 범죄자를 반대편 대륙까지 보내는 게 과연 정의로운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 언론은 호주에서 죄수들이 의외로 자유로운 삶을 누린다는 보도를 내놓기도 했고, 이는 처벌이 아니라 오히려 보상처럼 보일 수 있다는 비판을 낳았다. 실제로 품행이 양호하면 석방 허가, 조건부 사면, 심지어는 완전 사면까지 받을 수 있었고, 석방된 후에는 토지 소유도 가능했으며 일부는 식민 정부의 주요 직책에 임명되기까지도 하였다. 1794년 7월 시드니의 리처드 존슨(Richard Johnson) 목사는 고국에 보내는 편지에서 "형기가 만료된 사람들 중 상당수는 현지에 정착했고, 그중 일부는 영국의 농부들보다 더 나은 생활을 하고 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호주 내에서도 자유 이민자들이 늘어나면서 반대가 커졌다. 죄수들이 공급하는 값싼 노동력은 자유 이민자의 일자리를 위협했고, 범죄자들의 낙인은 사회 질서를 해친다고 여겼다. 시민들은 Anti-Transportation League를 조직해 이송 반대 운동을 벌였고, 제도 폐지를 요구했다. 1833년 한 해에만 7천 명의 죄수가 이송되면서 정점에 달했지만, 그 이후 이송은 점차 줄어들었고, 마지막 죄수선은 1868년 서호주에 도착하며 역사의 막을 내렸다.

형기를 마치거나 모범적인 경우 죄수들은 ‘Certificate of Freedom’ 또는 ‘Ticket of Leave’를 받아 사회로 나갈 수 있었다. Certificate of Freedom은 형기를 모두 마쳤음을, Ticket of Leave는 일정 조건을 충족하면 조기 사회 복귀를 허용한다는 증서였다. 이 문서를 손에 쥔 사람들은 농장에서 일하거나 작은 상점을 열며 호주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처음에는 죄수 출신이라는 낙인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오히려 도시 건설과 농업, 상업의 기초를 닦은 주역으로 자리 잡았다. Hyde Park Barracks 바로 옆에 위치한 St James’ Church도 죄수 출신 프랜시스 그린웨이가 설계하고 당시 죄수들의 손으로 건설한 교회이다. 메리 라이베리(Mary Reibey)는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 무역사업으로 성공해 자선가로서 사회적으로 크게 기여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녀의 업적을 기리는 것은 물론, 죄수라는 낙인을 넘어 노력을 통해 새로운 삶을 개척한 의미를 담아내기 위해 호주 정부는 20달러 지폐에 그녀를 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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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Ticket of Leave / (우) St. James' Church (출처: Wikimedia Commons)
new-twenty-banknote.jpg 호주 20달러 지폐의 Mary Reibey (출처: Reserve Bank of Australia 홈페이지)




세계문화유산이 된 호주 유형지

Hyde Park Barracks 외에도 유네스코는 Australian Convict Sites 총 11곳을 201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죄수들을 통해 유럽 열강이 대규모 죄수 수송과 식민지 확장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기반이었음을 보여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총 11곳의 리스트는 유네스코 홈페이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Kingston and Athur's Value Historic Area (Norfolk Island)

Old Government House and Domain (New South Wales)

Hyde Park Barracks (New South Wales)

Brickendon and Woolmers Estates (Tasmania)

Darlington Probation Station (Tasmania)

Old Great North Road (New South Wales)

Cascades Female Factory (Tasmania)

Port Arthur Historic Site (Tasmania)

Coal Mines Historic Site (Tasmania)

Cockatoo Island Convict Site (New South Wales)

Fremantle Prison (Western Australia)

호주 유형지 11곳.png Australian Convict Sites 지도 (출처: UNESCO 홈페이지)




Epilogue

Hyde Park Barracks는 죄수 수용소에서 이민자 숙소, 고아원, 법원, 박물관으로 용도가 계속 변화해 왔다. 이보다 더 흥미롭게 용도가 변경된 장소가 있는데, 바로 서호주의 Fremantle Prison이다. 관광 목적의 투어도 가능한 곳이지만, 유스호스텔로도 사용되고 있다. 죄수를 수용했던 감방 하나하나를 숙소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특이한 경험이겠다 싶어 숙소로 묵었던 경험이 있다. 수용자들이 쉽게 도망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높은 곳에 지었기에 숙소에서 바라보는 프리맨틀 시내의 전망마저도 좋은 곳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인데, 더 샅샅이 살펴보지 못했던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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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mantle Prison 입구 및 내부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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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mantle Prison 유스호스텔 입구와 실내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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