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 Fort of Melaka Heritage Gallery
말라카를 방문하면 반드시 들를 수밖에 없는 곳이 네덜란드 광장(Windmill Dutch Square Melaka)이다. 말라카 도심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스타더이스(Stadthuys)라는 새빨간 네덜란드풍 건축물이 강렬하게 인상에 남는다. 스타더이스는 현재 역사민속박물관(The History and Ethnography Museum)이지만, 그 앞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기념사진 포즈를 잡고,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트라이시클이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대면서 관광객을 호객하느라 여념이 없다. 신기하게 박물관도 비슷하다. 말라카 술탄국의 역사와 식민의 역사, 민속문화에 대한 전시, 정화(Cheng Ho)에 대한 전시가 뒤섞여 있는데 상세한 설명도 부족해 정신이 없다. 에어컨도 없어 심지어 덥기까지 하다. 말라카를 대충 이해하기에는 좋지만 내 머릿속에 남는 건 없었다.
이 박물관을 뒤로하는데 새빨간 스타더이스 건물과 대비되는 새하얀 유럽풍 건물이 눈에 띄었다. 너무 땀을 흘렸던 나머지 사전 정보도 없이 에어컨을 찾아 들어갔던 곳인데 역사민속박물관보다 훨씬 인상적이었다. 빵빵한 에어컨은 물론, 관람객도 거의 없어 찬찬히 전시물을 둘러볼 수 있었고, 심지어 무료였다. 말라카의 대표적 유적지인 A Famosa 요새를 기억하기 위해 조성한 Fort of Melaka Heritage Gallery의 방문기를 남겨본다. 둘 중 한 곳만 갈 시간이 된다면, 스타더이스 내에 있는 역사민속박물관보다는 이곳을 추천한다.
✔️ 사라진 A Famosa를 기억하는 복원 공간에서 마주한 식민의 역사, 그리고 엔리케의 세계일주 서사
✔️ 명칭: Fort of Melaka Heritage Gallery (말레이어: Galeri Warisan Kota Melaka)
✔️ 홈페이지: https://www.heritage.gov.my/gwkm.html (온라인 박물관)
✔️ 주소: https://maps.app.goo.gl/VH8QSihtqdbtE3Bc8
A Famosa는 1511년 포르투갈이 말레이시아 말라카를 점령한 직후 건설한 동남아시아 최초의 유럽식 석조 요새이다. Famosa는 포르투갈어로 '유명한'이란 뜻으로 유명한 요새로 이름 붙였다고 보면 된다. 당시 말라카는 중국, 인도, 아라비아, 유럽을 잇는 무역로의 핵심지였기에 포르투갈은 이 지역의 항구와 통상권을 장악하고, 군사적 거점을 신속히 구축하기 위해 A Famosa를 건축하였다. 군사적 방어 시설임은 물론 식민지 통치의 상징이자 유럽 제국주의의 전초기지였다.
A Famosa는 말라카 해협에서 말라카 강으로 들어오는 어귀에 건설해 정박하는 선박들을 감시하고 세금을 징수하는데 유리한 위치였고, 내륙으로의 접근성도 용이해 행정의 중심지이자 무역의 허브로도 최적화된 곳이었다. 그래서 네덜란드도 스타더이스를 총독의 관저이자 행정관청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현재는 요새 전체가 철거되고 성문(Porta de Santiago)만 남아 있지만, 건축 당시에는 단순한 요새를 넘어 식민도시 말라카를 통치하기 위한 복합 구조물이었다. 군사적 방어 목적으로 포대가 배치되어 있었고, 총독 관저, 행정관청, 법정, 감옥 등의 통치 목적, 성당과 예배당 등 종교적 목적, 세금 징수소와 항구 관리소 등 경제적 목적 모두를 아우르는 곳이었다. 현재도 세인트폴 교회(St. Pauls Hill Melaka)의 일부는 남아있다.
말라카의 지배권이 포르투갈에서 네덜란드, 영국으로 넘어가면서 A Famosa는 전략적 기능을 점점 잃어갔고, 유지비용만 많이 드는 요새로 취급받았다. 동남아시아의 주요 거점으로 싱가포르의 가치가 올라가면서 영국은 결국 A Famosa를 파괴하였고, 당시 자바섬의 총독이자 싱가포르의 창건자인 스탬퍼드 래플스(Stamford Raffles)가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고자 성문만은 남겨두었다.
말레이시아인에게는 가슴 아픈 기억이겠지만, A Famosa는 그 자체로 식민의 역사 전체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며, 16세기 이후 세계 무역 네트워크의 핵심이었음을 증명하는 곳이다. 하지만 실물 대부분이 사라졌기 때문에 다양한 방식으로 기억하고자 하는 노력이 이어졌고, 파괴된 유형 유산을 기억의 유산으로 전환해 남겨두고자 Fort of Melaka Heritage Gallery를 건립하였다.
역사민속박물관에는 실제 유물이 가득하지만 단순 나열에 그치는 반면, 이곳은 실내 일부를 요새처럼 복원해 실재감을 높이고 실제 유물은 적지만 상세한 설명과 지도 등으로 말라카 역사에 대한 이해도를 훨씬 높인다.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당시 요새의 모습을 모형으로나마 복원해 전시하였고, 현장에서 발굴된 잔해와 유물, 요새에 사용되었던 무기 등을 보여주며 요새가 어떤 기능을 했는지 상세하게 설명한다. 모든 전시물에 영어로도 친절하게 설명한다. 또한 핵심 무역항으로써 어떤 배들이 드나들었는지, 어떤 물품들을 주로 거래했는지, 제국주의자들이 어떤 유물들을 약탈해 갔는지도 말해준다.
요새보다 인상 깊은 스토리도 있었다. 전시물을 둘러보던 중 벽면 전체에 전시한 마젤란의 항해지도가 눈에 들어왔다. 해상무역의 중심지였기에 당연히 있을 법한 전시라 생각했지만, 처음 들어본 이름 엔리케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우선 마젤란의 항해부터 살펴보자. 페르디난드 마젤란(Fernando de Magallanes)은 세계 최초로 지구 일주 항해에 성공한 인물이다. 엄밀히 얘기해 필리핀 막탄 섬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마젤란 개인은 세계 일주에 성공하지 못했으나, 그의 함대가 출발지로 복귀했기 때문에 최초로 지구 한 바퀴를 돈 인물로 간주한다. 1519년 스페인을 출발한 마젤란 선단은 남쪽으로 대서양을 가로질러 남아메리카 연안을 돌아 태평양으로 건너간다. 이때 발견한 남아메리카 끝단 해협을 '마젤란 해협'이라 칭한다. 어렵게 현재의 괌(Guam) 섬에 도착했고, 필리핀 민다나오(Mindanao) 섬을 거쳐 현재의 세부 막탄(Mactan) 섬에 도착한다. 마젤란은 이 지역에 가톨릭을 전파하고, 점령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다. 마젤란은 당시 세부 섬의 국왕인 라자 후마본(Rajah Humabon)과 의형제를 맺고, 막탄 섬을 두고 경쟁하던 라푸라푸(Lapu-lapu)를 죽이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병력 수에서 밀린 마젤란 부대는 참패하였고 마젤란도 무참히 살해당해 그의 항해는 끝나고 말았다. 항해를 시작한 지 불과 2년 후인 1521년의 일이었다. 나머지 선원들은 항해를 계속해 1522년 본국으로 귀환했지만, 270명, 5척으로 시작한 항해는 돌아올 때 18명, 1척에 불과했다. 필리핀에서 스페인으로 귀환하는 길은 이미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 등 포르투갈이 개척한 항로 덕분에 상대적으로 수월했다고 한다.
박물관은 여기서 엔리케라는 인물을 언급한다. 엔리케는 포르투갈이 말라카를 점령할 때 노예로 잡아간 현지인으로, 통역 등을 위해 마젤란이 항해에 동행시킨 인물이다. 말라카에서 노예로 잡혀 스페인까지 가게 된 엔리케는 마젤란의 선단에 승선하면서 세부까지 동행하였고, 마젤란이 세부에서 죽은 뒤 이탈하여 고향 말라카로 귀환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개인으로서 최초의 세계 일주는 마젤란이 아닌 엔리케라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복귀했는지 여부는 남은 기록이 없어 확실치 않다.
그럼에도 말레이시아가 그를 역사에 담아둔 이유는 말레이시아의 작가 하룬 아미누르라시드(Harun Aminurrashid)의 소설 <Panglima Awang>에서 엔리케를 자기 정체성과 고향을 잃지 않은 민족 영웅으로 그려낸 영향이 크다. 소설에서는 그를 단순히 끌려간 노예로 보지 않고, 말레이어와 아랍어, 스페인어까지 능통한 지식이자, 마젤란 선단에도 주체적으로 올라타서 결국 귀환까지 해낸 스스로 운명을 개척한 인물로 묘사한다. 상상력만으로 그려낸 인물이 아님은 분명하기에 오랫동안 식민지를 겪은 말레이시아의 역사에서 민족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기제가 되기에도 충분해 보인다. 박물관에서도 다음과 같은 문구를 찾을 수 있다.
"Enrique of Malacca: The First Circumnavigator?"
Appendix 1. Fort of Melaka Heritage Gallery를 온라인상으로 만날 수 있는 곳
말라카에서 다녀본 대부분의 박물관 홈페이지는 다소 부실하고 정보도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 박물관은 온라인으로도 너무나 생생하게 전시물을 볼 수 있다. 전시물에 대한 상세한 설명까지 일일이 읽을 수는 없지만, 사라진 요새를 기억하는 공간으로 기능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https://www.heritage.gov.my/gwkm.html
Appendix 2. 엔리케를 더 만나볼 수 있는 곳
필리핀 마닐라에 있는 AIMS Museo Maritimo, 싱가포르에 있는 아시아문명박물관(Asian Civilization Museum)에서도 엔리케에 관한 전시가 있다. 말레이시아에서만 주장하는 인물이 아닌 동남아시아가 공유하고 있는 역사적 인물인 것이다.
1) AIMS Museo Maritimo https://maps.app.goo.gl/tw6VjSo1974PZPXa7
2) Asian Civilisations Museum https://maps.app.goo.gl/yWVG5CA3bbRuzKqA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