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 [평택] 삼봉기념관
조선의 국가운영 철학과 제도를 설계한 사람, 삼봉(三峯) 정도전. 내가 어릴 적에는 그의 이름을 교과서에서도, 다른 역사서에서도 비중 있게 다룬 것을 보지 못했다. 태종 이방원에 의해 '왕자의 난' 때 제거된 인물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이 방영되면서 인지도 상승과 더불어, 이방원의 정적에서 조선을 창조한 인물로 대중들에게도 인식의 변화가 생긴 것 같다. 후손들이 노력하고 지역사회가 지원한 덕에 경기도 평택시에 삼봉기념관도 2004년 건립되면서 그에 대한 재평가가 회복되고 있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의 주요 문인이나 재상에 비하면 그에 대한 평가는 박하기만 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성리학을 정비하고 국가통치 이념으로 설계한 율곡 이이도, 민본주의 이념을 설파한 다산 정약용도 정도전이 디자인한 조선 설계도를 토대로 한다. 그럼에도 정도전은 두 인물에 비해 업적에 걸맞은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개혁을 막은 정몽주는 충절의 상징으로 높이 평가받는 반면, 정도전은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진 고려를 개혁하고자 역성혁명을 성공시킨 핵심 인물임에도 말이다. 그가 지금까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이유를 따라가 보기 위해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에 위치한 삼봉기념관에 다녀왔다.
✔️ 조선을 설계한 개국공신 정도전의 지워졌던 업적들을 되돌아보고, 지워진 업적만큼이나 아쉬운 삼봉기념관에서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길 기대해 본다.
✔️ 명칭: 삼봉기념관 (문헌사, 희절사 등까지 통칭해 평택시에서는 정도전 유적지라 칭하기도 함)
✔️ 홈페이지: https://www.pyeongtaek.go.kr/tour/main.do (평택시 문화관광 홈페이지)
✔️ 주소: https://maps.app.goo.gl/8S3gK3DfL8hYitkz7
조선의 건국은 태조 이성계이지만, 그 뒤에서 조선의 국가운영 철학과 통치제도를 만들어 낸 정치가가 정도전이라는 점은 모두들 알 것이다. 과소평가받고 있다는 개인적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우선 그의 업적을 정리해 본다.
첫째, 백성이 국가의 근본이라는 민본(民本) 정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고려 말 정치는 타락하고 권문세족은 토지와 재산을 독점하며 농민들을 착취하던 시기였다. 정치의 기반이었던 불교는 타락하여 귀족과 결탁한 종교권력이 되어 있었다. 이 모두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온건한 개혁이 아닌 역성혁명을 통한 국가체제 전환만이 답이라 생각했다. 불교가 아닌 성리학 이념을 바탕에 둔 국가를 설계할 필요가 있었고, 성리학의 기본 정치이념인 덕치주의와 민본주의를 채택했다.
1394년 저술한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그의 통치철학과 제도를 살펴볼 수 있다. 이 책은 나라를 경영하는 큰 원칙을 제시한 헌법에 해당한다. 이 책은 민본주의에 입각해 임금이 지켜야 할 도리와 조선으로 국호를 정한 이유, 후계자를 정하는 원칙을 제시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치전, 부전, 예전, 정전, 헌전, 공전 등 6전으로 나누어 각 기관에서 해야 할 직무를 설명한다. 이 책에 담긴 통치철학은 천지자연의 이치에 따라 생명을 아끼는 마음, 곧 인(仁)을 바탕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민본정치를 실현하여 유교적 이상국가를 만들자는 것이다. 조선경국전은 성종 때 편찬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모체가 되었다.
정도전은 맹자가 말한 "민위귀 사직치지 군위경(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 즉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은 그다음이며, 임금이 가장 가볍다."는 사상을 바탕에 두고, 군주의 권력은 백성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라는 철학을 국가설계의 중심에 두었다. 결국 백성이 잘 살아야 국가가 안정될 수 있다는 현실주의적 명분도 누구보다 잘 이해한 것이다. 그는 맹자의 말을 풀어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임금은 나라에 의존하고, 나라는 백성에 의존하는 것이니, 백성이란 나라의 근본이고 임금의 하늘이다."
둘째, 유교가 불교와 도교보다 우월함을 논증해 조선을 유교국가로써 전환하였다. 앞서 말했듯이, 불교는 국가권력과 결탁하여 승려가 관직에 오르고 정사에 개입함을 물론, 막대한 토지를 사유화해 대규모 사찰을 짓고 그럼에도 세금과 부역은 면제받는 각종 특혜를 무수히 받고 있었다. 고려 말 불교의 타락이 극에 달하자 정도전은 국가통치에 불교가 전혀 도움 되지 않음을 역설하고,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이를 논증한 저서가 1398년 집필한 불씨잡변(佛氏雜辨)이다. 불교의 폐단만을 강조하지 않고, 성리학의 시각에서 불교철학이 이론적으로 모순이 있고, 인간윤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20개 조목으로 나누어 비판한 책이다. 불교의 핵심 이론인 윤회설, 인과설, 심성설, 진가설, 자비설, 지옥설, 화복설, 걸식설 등을 차례로 비판하고, 그 해독을 역사적으로 설명한다. 정도전의 불교 비판은 성리학자의 입장과 사회개혁의 필요에서만 불교를 바라보았으므로 불교의 종교적 순기능은 철저히 배제했다는 아쉬움은 남는다.
셋째, 전제군주 국가가 아닌 신권(臣權) 정치를 도입해 입헌군주국가로서의 통치체제를 확립하고자 했다. 즉 덕망 높고 경륜이 많은 재상 중심으로 의사결정되는 구조를 만들고자 하였다. 이는 민본을 제도화하기 위한 방법론이기도 했다. 전제적 왕권을 구축하고자 했던 태종과 가장 대립되었던 지점이기도 했고, 결국 이방원의 손에 죽은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1395년 저술한 경제문감(經濟文鑑)에서 그의 생각을 읽어볼 수 있다. 이 책은 <조선경국전> 가운데 권력구조를 설명한 치전(治典)의 내용을 보완한 것으로, 세습제로 이어지는 임금은 언제나 현명한 분이 나오는 것이 아니므로 민본적 이상국가를 만들려면 능력을 평가하여 뽑혀 올라온 재상이 실권을 쥐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아래 언론과 감찰을 맡은 대관(사헌부; 사법적∙행정적 감찰을 담당하는 기관), 간관(사간원; 정치적 견제와 비판을 담당하는 기관), 국방과 치안을 맡은 위병, 지방의 감사와 수령이 올바른 정치를 펴야 한다고 서술한다. 이런 시각에서 재상제도의 역사적 유래와 직책을 설명하고, 이어 대관, 간관, 위병, 감사, 수령의 올바른 직책을 차례로 설명하였다. 뒤에 이 책을 보완한 <경제문감별집>을 저술하여 군주의 직책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넷째,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면서 한양도성을 설계하였다. 이론가로서의 역할을 넘어 이론을 실질화시킨 역할까지 해낸 것이다. 정도전은 태조 3년에 한양으로 천도가 결정되자 도성의 터를 설계하고 궁궐, 전각, 사대문, 사소문 및 한성부 52방의 이름을 지었다. 예를 들어, 경복궁의 경복(景福)은 '큰 복을 누리라'는 뜻이며, 경복궁 내 근정전의 근정(勤政)은 '근면하게 정사를 돌보라'는 의미이다.
태종은 왕권 중심의 정치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정도전이 설계한 신권 중심의 정치체제는 이방원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고, 결국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생을 마감했다. 조선 개국 일등공신의 비참한 말로였다. 그래서일까 그의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실록에 그의 기록은 매우 짧게 언급될 뿐이고 심지어 비굴한 모습까지 묘사해 그를 패자의 이미지로 만들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 만큼 악의적 비하와 의도적 은폐가 아닐까 하는 비판적 관점의 해석이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후대에 그의 업적은 조금씩 재평가되기 시작한다. 삼봉의 장자인 정진은 자헌대부형조판서까지 역임하였고, 사후 세종대왕이 의정부 우찬성으로 추증하여 희절(僖節)이란 시호를 내렸다. 당시라면 역적의 자식으로 연좌되었을 시기였지만, 살아남았음은 물론 판서로서의 공적도 인정받았던 것이다. 손자(정진의 장남과 차남)도 관직을 맡았고, 증손자인 정문형은 우의정까지 지냈다. 삼봉은 공식적으로 복권되지 못했으나, 그의 후손들이 꾸준히 관직에 오르며 정치적으로는 복권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희절공(장자 정진)은 삼봉의 일부 시문과 저서, 그리고 중국 기행문 <봉사록> 등을 수집하여 2책의 홍무초본(洪武初本)을 간행하였고, 양경공(증손자 정문형)은 세조의 허락을 받아 6책으로, 신숙주가 서문을 붙여 총 7책으로 증편∙간행하여 삼봉의 저술을 후대에 남겼다.
1791년 정조는 삼봉의 학문과 정치적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삼봉집을 보완하여 편찬하라는 명을 규장각에 내렸고, 누락된 글을 보완해 14권 7책으로 증편∙간행하여 목판으로 서각하였다. 이것이 <삼봉집(三峰集)>으로, 이의 영구 보존을 위해 네 곳의 사고에 보관하였고, 정족산사고와 태백산사고에 보관했던 완벽한 삼봉집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후손인 봉화정씨문헌공파대종회의 소장본이 삼봉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후 공식적으로 그의 공적을 회복시킨 것은 고종이었다. 태조는 1395년 정도전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유종공종(儒宗功宗; 선비에서도 으뜸, 공적에서도 으뜸이라는 뜻)'이란 친필을 하사하였는데, 1865년 고종은 유종공종 편액(글자를 써서 벽이나 문 위에 걸어 놓는 널조각)을 그의 후손들에게 내렸다.
고종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삼봉이 조선 건국의 창업과 한양도성의 건설 및 각 법궁과 전각의 이름을 지은 업적에 감명을 받아 1870년 삼봉의 모든 훈작을 회복시키는 복훈교지(復勳敎旨)를 내린다. 또한 1872년에는 삼봉의 제사에 제문을 지어 보내기도 했다. 1908년에는 '문헌(文憲)'이라는 시호(諡號; 사후에 국가가 공식적으로 내리는 존칭)를 내렸다. ‘문(文)’과 ‘헌(憲)’은 모두 가장 높은 등급의 시호로, 그만큼 뛰어난 유학자이자 국가체제의 설계자였음을 의미한다.
삼봉기념관은 삼봉집의 목판이 1988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되어 전시 및 보관하는 곳으로 2004년 평택시에서 건축한 기념관이다. 삼봉집 외에도 삼봉의 영정, 저서, 연보, 교지, 시문, 친필액자, 친필서간문 등 12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삼봉기념관에는 문헌사도 함께 있다. 문헌사(文憲祠)는 문헌공 정도전을 모신 사당으로 매년 음력 9월 9일에 평택시는 추모제를 올린다. 내가 방문했을 때에는 문헌사 내로 입장이 불가하였는데, 정도전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된 사당에는 고종이 내린 '유종공종' 편액이 걸려있었다. 정도전의 장자인 희절공을 모신 희절사(僖節祠)와 희절공 묘역도 함께 위치해 있다.
보통 이러한 박물관 또는 기념관을 건립할 때, 현재 우리가 얼마나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지가 중요 잣대가 된다. 즉 예산의 책정도, 부지의 위치도, 건축물의 규모도 현대의 평가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곳은 후손들의 집성촌에 건립하였다 하더라도 너무 외진 곳이라 사람들이 찾기 어려워 보였고, 규모도 협소해 다양한 전시물과 기록물을 담기에 부족해 보였다. 건립이 결정되었던 당시 정도전에 대한 평가 수준이 드러났던 것이라 생각한다. 만약 그에 대한 현대의 평가가 높아진다면 국가는 그 위상에 맞는 기념관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삼봉 정도전 기념사업회 이사였던 최상용 교수는 우리 역사상 최고의 정치가로 정도전을 꼽는다. 세계사적 수준에서 그 어떤 정치가와 비교해도 그리고 한국사에 등장했던 그 어떤 정치가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는 것이다. 냉혹한 권력투쟁 속에서도 확고한 정치철학과 이념을 갖고 권력의 제도화를 통해 새로운 국가인 조선을 건설한 위대한 정치가라 평가한다. 앞으로도 정도전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또 달라질지 궁금해진다.
Appendix 1. 명(明)의 눈치를 봤기 때문에 유교를 채택한 것은 아닐까?
정도전은 경제문감 사대편(事大篇)에서 “큰 나라에 공손하게 사대하는 것은 소국이 살아남는 도리이다.”라 했다. 조선의 전략적 외교 방향일 수밖에 없다 치더라도 명 외에 타국과의 교역에 문을 닫았던 것도, 유교 외에 다양한 종교적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못한 아쉬움의 바탕에는 명에 대한 사대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조선 건국에 앞선 1368년 주원장이 한족 통일왕조이자 유교이념을 채택한 명을 건국하였다. 왕 씨에서 이 씨로 역성혁명을 이룬 조선은 명의 승인을 득하는 게 매우 중요한 과제였을 것이다. 만에 하나 명이 조선을 반란국으로 규정하고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외교적으로도 고립될 수밖에 없고 명의 무력 개입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과 동일하게 채택한 유교 이념은 역성혁명과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전략적으로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옵션이었을 것이다. 나쁘게 얘기하면 눈치이지만, 이미 동아시아 질서가 명으로 재편된 상황에서 조선이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Appendix 2. 왜 평택에 건립했을까?
충북 단양에서 태어나 경북 영주에서 자라고 전남 나주에서 유배 생활을 한 정도전의 기념관이 왜 평택에 있을까? 삼봉기념관이 자리한 진위면 은산리에는 정도전의 후손 봉화 정씨 가문의 집성촌이 있기 때문이다. 정도전이 죽임을 당한 뒤, 후손들은 감시와 탄압을 피해 숨죽이고 살기 위해 이곳 평택에 터전을 꾸렸던 것이다.
Appendix 3. 도담삼봉의 삼봉?
충북 단양에 있는 도담삼봉의 '삼봉'을 따라 정도전이 자신의 호를 명명했다고 알고 있었다. 단양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더욱 그런 전승이 이어졌던 것 같다. 하지만 이는 정설은 아니고, 개경 근처의 삼각산 또는 송악산 자락의 세 봉우리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게 학계의 일반적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