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림트의 반란과 유산, 빈 분리파

#013. [오스트리아] Secession

by Muse u mad

개인적으로 미술관은 박물관만큼 좋아하진 않는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인데, 내가 아는 게 없어서이다. 그렇지만 빈(Wien)에 가면 미술관이 너무나 많고, 위대한 작품도, 위대한 예술가도 많아 미술관에 방문하지 않으면 여행을 했다고 말할 수 없는 도시이다. 외국인이 한국에 여행 왔는데, 경복궁이나 창덕궁 한번 들르지 않는 꼴이랄까. 프랑스에 가면 모나리자는 한번 봐야 하는 만큼, 빈에 왔으니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작품 <키스(kiss)>는 한번 봐야 하지 않겠는가 싶어서 벨베데레 궁전(Schloss Belvedere)으로 향했다. 도슨트에게 들은 작품 설명도 인상 깊었지만, 클림트의 인생과 작품의 전환점을 느끼기 위해서는 제체시온(Secession; 빈 분리파 전시관)에 한번 들러보는 것도 좋다는 추천을 받았다. 반항아의 면모를 들은지라 그가 남긴 훌륭한 작품보다 그의 인생과 미술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가 더 궁금해졌다.



한 줄 요약

✔️ 19세기말 보수적 예술 질서에 반기를 든 클림트는 빈 분리파를 통해 예술의 자유를 선언했고, 그 정신은 제체시온에 남아 이어지고 있다.


박물관 개요

✔️ 명칭: Secession (빈 분리파 전시관)

✔️ 홈페이지: https://secession.at/

✔️ 주소: https://maps.app.goo.gl/gdYp4aeFkcwX4hR67



보수적 체제 속의 반항아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는 우리에게 반항아 또는 이단아로서의 이미지가 있다. 하지만 그도 처음에는 아카데믹한 화풍으로 크게 인정받고 시대에 조응하던 화가였다. 빈 응용미술학교에서 전통적인 미술 교육을 받은 소위 정통성 있는 출신이었고, 1888년에는 빈 부르크 극장의 천장화 작업의 공로로 프란츠 요제프 1세로부터 '황금공로십자훈장'을 받기도 했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이미 공공 대형 작업을 맡을 만큼 뛰어난 화가였고, 우리가 아는 그의 작품과는 전혀 다른 아카데믹한 화풍의 작품이었다.

Klimt_-_Thespiskarren.jpg <The Carriage of Thespis> 클림트가 그린 빈 부르크 극장의 천장화 중 일부 (출처: Wikimedia Commons)


클림트가 젊은 시절인 19세기 후반 유럽의 미술계를 보면, 프랑스에서는 이미 마네(Édouard Manet), 모네(Claude Monet), 고갱(Paul Gauguin), 고흐(Vincent van Gogh) 등의 인상주의 화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고, 영국에서는 아르누보(Art Nouveau) 사조가 발흥하였으며, 일본의 개항 이후에는 우키요에(浮世絵: 일본 에도시대에 당대 사람들의 일상생활이나 풍경, 풍물 등을 그린 풍속화)가 유럽으로 전파되면서 화가들은 그들과 전혀 다른 일본 화풍에 매료되어 있었다. 일본에 영향을 받은 화풍을 자포니즘(Japonisme)이라 칭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미술계는 여전히 보수적이었다. 전통예술을 가장 중시했기 때문에 궁정 화가의 위상이 가장 높았고, 예술 전시도 국가전시회나 황실미술관이 통제함으로써 새로운 양식의 예술가들이 진입할 수 있는 통로가 막혀 있었다. 19세기 후반 20대와 30대를 살던 클림트는 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고, 보수적인 미술계에 순응하지 않고, 본인만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다.

빈 대학교(Universität Wien)에서 의뢰받은 3개의 학문(법학, 의학, 철학)을 상징하는 그림이 격렬한 비판 끝에 걸리지 못한 것을 보면, 20세기 초까지 이어진 오스트리아 미술계의 보수성을 확인할 수 있다. 에로티시즘 화풍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담고 있는 내용이었다. <법학>은 정의보다 무질서와 고통이 인간을 둘러싼 듯하고, <의학>은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을 보여주는 듯하고, <철학>은 인간이 우주의 이치를 알기에는 미미한 존재라는 느낌을 준다. 그 당시 대학 관계자들은 클림트가 대학이 탐구하고자 하는 목표를 비웃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빈 대학교에 제작비 전액을 돌려줬고 본인이 직접 소유하였으나, 이후 나치로부터 퇴폐미술이라 낙인찍혀 압류당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소실되었다. 현재는 레오폴드 미술관(Leopold Museum)에서 사진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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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대학교가 클림트에게 의뢰해 완성한 작품. (왼쪽부터) 법학, 의학, 철학




예술의 자유를 선언한 빈 분리파

오스트리아 예술가들이 이미 새로운 흐름에 눈을 떴음에도 구 아카데미 체제가 이를 수용하지 못한다고 느낀 클림트는 1897년 '빈 분리파(Wiener Secession)' 결성을 주도한다. 기존 질서로부터 분리해 독립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클림트가 회화 분야 멤버이자 초대 회장을 맡았고, 그래픽 및 디자인 분야에서는 콜로만 모저(Koloman Moser), 건축 분야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Josef Maria Olbrich) 등 다양한 분야에서 19명의 예술가들이 모여 창립하였다. 이듬해인 1898년 빈 분리파를 상징할 수 있는 공간으로 구축한 곳이 바로 빈 분리파 전시관, 즉 제체시온이다. 단지 전시공간을 별도로 두었다는 것이 아니라, 클림트와 동료들이 예술적 자유를 선언한 공간이자 예술적 실험을 하기 위한 무대를 만든 것이다. 하지만 클림트와 빈 분리파는 오래가지 못했다. 클림트는 빈 분리파가 점점 상업화된다는 내부 비판을 던지고 불과 결성 8년 만인 1905년에 단체를 탈퇴한다.

KakaoTalk_20250802_104142590.jpg <빈 분리파 창립 멤버 사진(Leopold Museum 전시)> 혼자만 의자에 앉아있는 클림트의 모습도, 왼쪽 상단의 건축 노동자들도 함께 사진에 남긴 점이 인상적이다.


빈 분리파에서의 활동시기는 짧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클림트의 작품 대부분은 빈 분리파 결성 이후이다. <키스>, <유디트>, <아담과 이브>, <베토벤 프리즈> 등은 물론이고, 빈 대학교에서 의뢰했던 <법학>, <의학>, <철학>도 마찬가지이다. 세계적 걸작이 빈 분리파 결성 이후 나왔다는 것, 즉 자유로운 예술을 선언하고 난 이후이니 짧은 활동기간임에도 빈 분리파가 클림트의 예술활동에 남긴 역사적 흔적은 매우 강렬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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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키스>, <유디트>


클림트 개인보다도 오스트리아 예술계에 끼친 영향력은 더 크다. 빈 분리파와 전시관은 오스트리아 현대 예술의 출발점이 되었고, 외국 작가의 작품들을 대거 소개하며 국제적인 예술 교류의 장이 되었다. 또한 '회화만이 예술이 아니다'라는 선언 아래 건축, 가구, 포스터 등까지 예술로 격상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무엇보다 전시관 돔의 문구처럼 예술에 자유를 부여한 것이 그들의 가장 큰 기여였다. 오스트리아에서 사용하는 50센트 유로화에 제체시온의 돔이 들어간 것만 보아도 역사적 기여와 영향력을 알 수 있다. 전시관에는 다음과 같이 빈 분리파를 상징하는 문구가 적혀있고, 이 선언은 현재도 시대를 관통하는 메시지로 남아 있다.

Der Zeit ihre Kunst, der Kunst ihre Freiheit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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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제체시온 돔과 빈 분리파를 상징하는 문구 / (오른쪽) 제체시온이 담긴 오스트리아 50센트 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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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클림트가 그린 제1회 빈 분리파 전시 포스터(1898) / (오른쪽) 에곤 실레가 그린 제49회 빈 분리파 전시 포스터(1918)





제체시온에 전시된 단 하나의 상설 전시

전시관의 상설 전시 작품은 단 한 가지 <베토벤 프리즈(Beethovenfries)>이다. 다른 전시실은 기획전으로 수시로 바뀐다. 클림트가 빈 분리파에서 활동할 당시에 그린 작품이자 이 전시관에 전시했던 작품 하나는 상징적으로 남겨두었고, 그들이 선언한 대로 다른 전시실은 시대에 맞는 예술을 위해 다른 작가들에게 기회를 주고 있다.

빈 분리파는 1902년 '베토벤에게 경의를 표한다'를 주제로 전시회를 기획하였는데, 베토벤 교향곡 9번(합창 교향곡)을 주제 삼아 '고통에서 기쁨으로, 예술을 통한 이상세계의 도달'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때 클림트는 <베토벤 프리즈>라는 벽화를 출품하였고, 다른 분리파 회원들도 같은 주제로 조각상, 장식, 가구, 건축적 디테일 요소 등을 출품하였다. 빈 분리파가 추구하는 가치와 같이 회화, 건축, 조각, 음악을 총아하는 종합예술 전시였다.

지하에 위치한 전시실로 들어가면 <베토벤 프리즈>가 3면에 둘러 있다. 입구로부터 왼쪽에 위치한 작품은 인간의 고통과 희망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인간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예술을 통해 구원을 열망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중앙에 위치한 작품은 인간의 내면과 외부에 있는 유혹, 불안, 폭력에 직면하는 모습을 통해 투쟁하는 인간을 보여주었고, 오른쪽에 위치한 작품은 두 연인이 포옹하는 모습을 그려 예술을 통해 이상세계에 도달했음을 구현하였다.

KakaoTalk_20250801_205503445_09.jpg <베토벤 프리즈> 전시 공간


KakaoTalk_20250801_205503445_07.jpg 2024년 1월 전시된 Charlie Prodger의 작품 <The Offering Formula>




Epilogue

상술했듯이 제체시온에는 클림트의 작품이 <베토벤 프리즈> 하나밖에 없다. 다양한 클림트의 작품을 감상하고자 하는 분은 여기가 아니라 벨베데레 궁전이나 레오폴드 미술관에 가야 한다. 또는 클림트가 말년에 사용하던 작업실을 복원한 클림트 빌라(Klimt Villa)에 가면, 그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다.

또는 클림트가 1900년 이후 매년 휴가를 떠났던 아터호수(Attersee) 인근 지역을 방문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는 여기서 수십 점의 풍경화를 그렸는데, 이를 기념해 아터호수 지역에서는 클림트 산책로를 조상하고, 동상을 세워두기도 했으며, 풍경화를 아카이빙하고 재현 영상을 전시한 클림트 센터(Klimt-Zentrum)를 건립하였다.

KakaoTalk_20250802_200514153.jpg 아터호수 인근에 있는 클림트 동상


1. 클림트 빌라(Klimt Villa) https://maps.app.goo.gl/o7m4ocsHB6rXx5WCA


2. 클림트 센터(Klimt-Zentrum) https://maps.app.goo.gl/BfdomTgG9LWE69Cs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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