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 [인천] 한국이민사박물관_1편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유대인을 떠올린다. 그들이 2천여 년 넘게 겪어온 핍박의 역사를 봐도, 여전히 전체 유대인 인구(1,570만 명) 중 54.1%(850만 명)가 이스라엘 밖에 거주 중인 현실을 봐도 디아스포라는 유대인을 이해하는 키워드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 타지에 정착해 살아가는 민족 집단의 흩어짐을 의미하는 용어임을 생각해 봤을 때, 우리의 디아스포라도 만만치 않다. 재외동포청에 따르면, 2022년 말 기준 재외동포는 총 708만 명으로, 대한민국 국민 4,857만 명(대한민국에 거주 중인 외국인 제외)의 14.6%에 달한다.
이처럼 재외동포가 많은 이유는 최근 비즈니스와 유학 목적의 해외 체류가 급격하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초기 이민은 유대인 못지않게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이었고, 그 후손들이 현지에 여전히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우리 이민의 역사는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살펴보기 위해 해외 이민이 시작된 도시인 인천에 있는 한국이민사박물관에 다녀왔다. 재외동포청 본청도 한국이민사박물관도 왜 인천에 있는지는 이 박물관을 둘러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
✔️ 만주와 연해주, 일본의 강제징용, 최초의 공식 이민 하와이, 멕시코와 쿠바까지 20세기 초까지의 이민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 명칭: 한국이민사박물관
✔️ 홈페이지: https://www.incheon.go.kr/museum/MU040102 (인천광역시립박물관 홈페이지)
✔️ 주소: https://maps.app.goo.gl/y3CxZRJ7LsbqVjhFA
청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국가로 그들은 만주 지역을 신성한 근거지로 여겼다. 그래서 청나라 내 압도적으로 많았던 한족이 만주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면 만주족의 정체성이 약화될까 우려하였고, 이에 청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한족의 만주 이주를 차단하는 봉금령(封禁令)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아편전쟁 이후, 국경 방어와 자원 개발, 농경지 개간 등을 위해 한족의 이주를 사실상 묵인하였다. 이때 조선인들도 만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19세기 중엽 한반도 북부에 닥친 연속된 흉년과 기근, 혼란한 정세 속에서 탐관오리의 부패와 착취를 피해 새로운 삶의 기회를 찾기 위함이었다. 현재 만주 지역에 개간된 농경지와 벼농사는 우리 한민족의 노력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이후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만주 전역으로 이주하여 1945년 해방 직전에는 한반도 인구의 10%에 달하는 210만 명의 한민족이 거주하였다. 광복 후 약 70만 명은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만주에 남았고, 이들이 현재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민들이다.
연해주로의 이주도 마찬가지 이유였다. 1860년 러시아가 연해주 지역을 차지한 후, 해안과 농경지 개발이 필요했던 러시아와 생계를 위해 두만강 북부로 넘어갔던 조선인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러시아 정부는 개척을 장려하기 위해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하기도 하고, 세금과 병역 감면과 같은 인센티브를 주기도 했다. 조선인의 이주는 크게 증가하였고, 1900년대 초에는 조선인의 수가 6~7만 명에 이르렀다. 이에 1900년대 말 러시아 정부는 시내 중심가에 살던 조선인들을 강제로 외곽으로 이전시켰고,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조선인의 집단거주 구역인 신한촌(新韓村)이 건설되었다. 1937년 연해주 전역의 조선인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면서 신한촌은 해체되었고, 주민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신한촌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1999년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는 신한촌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조선말 개항 이후 근대화된 일본을 공부하기 위해 갔던 유학생들이 일본 이주의 시작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숫자는 미미했고, 강제병합 이후가 본격적인 이민의 시작이다. 일본은 토지조사 사업과 식민지 수탈로 우리 농민의 생계 기반을 붕괴했고, 1920년부터 시작된 산미증식계획(한국에서 쌀 생산량을 늘려 일본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정책)은 농촌을 더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농촌을 떠났고, 근대화 이후 노동자가 부족했던 일본에서 공장 인부, 광산 노동자 등으로 취업하기 위해 이주를 시작했다. 1915년 약 4천 명 규모였던 재일 한국인은 1920년 약 3만 명으로 급증하였다. 이때 건너간 사람들이 정착했던 곳이 현재의 오사카와 도쿄 등지의 코리아타운이다.
중일전쟁(1937)과 태평양전쟁(1941) 이후, 일본은 군수산업에서 일할 노동력이 더 부족해졌고, 1938년 국가총동원법 제정과 1939년 국민징용령을 내려 한국인 청년 약 72만 명을 일본으로 강제 징용하였다. 이들은 일본은 물론 사할린, 남양군도로까지 연행되어 탄광, 광산, 토목건축, 공장, 항만, 농장으로 보내졌다. 남양군도(南洋群島)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국제연맹으로부터 위임 통치한 태평양의 섬들로, 현재의 서태평양 미크로네시아 지역이다. 오늘날 북마리아나 제도(사이판), 팔라우, 미크로네시아 연방, 마셜 제도이다. 한국인 노동자와 병사의 죽음을 추모하는 위령탑이 사이판에 세워진 이유도, 2017년 개봉한 영화 <군함도>가 제작된 이유도 강제 징용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노동 이주와 강제 징용으로 해방 직전인 1944년까지 무려 약 200만 명의 한국인이 일본에 거주하게 되었다. 1945년 해방은 되었지만, 귀국해도 고향에 생활기반이 없었던 재일한국인들은 귀국을 미룰 수밖에 없었고, 1946년 말 조국으로의 집단 귀국이 종료되면서 60만 명은 일본에 잔류하게 되었다.
하와이는 19세기 중엽부터 사탕수수 농장이 본격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설탕의 수요가 비약적으로 증가하던 시기에 기후 조건이 최적인 하와이가 주목받게 된 것이다. 초기 노동력은 하와이 원주민이었으나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그 대안으로 중국과 일본에서 노동력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국민의 일자리를 뺏는다는 이유로 미국은 1882년 중국인 배척법을 통과시켜 중국인의 이민과 귀화를 금지하였고, 일본 이민자들이 노동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한다는 이유로 하와이 농장주들은 일본인을 받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닥치자 농장주들은 차선책으로 한국인 노동자를 선택하게 된다.
고종은 하와이 이민 사업의 책임자로 데쉴러(D.W.Deshler)를 임명하고, 1902년 처음으로 하와이 이민 모집을 공포한다. 처음 121명이 인천 제물포를 떠났고, 일본 나가사키에서 받은 신체검사에서 탈락한 19명을 제외한 102명이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다시 한번 질병검사를 했는데 16명이 탈락하고 최종 86명만이 상륙 허가를 받았다. 이후 1905년까지 총 64회에 걸쳐 하와이 이민이 이어졌고, 총 7,415명이 하와이에 터전을 잡게 된다. 사탕수수 농장과의 노동 계약이 종료된 후 약 2,000여 명은 미국 본토로 이주하여 정착했고, 약 1,000여 명은 조국으로 돌아갔다. 남아있는 대다수는 식민지가 된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하고 하와이 정착을 택했다.
하와이 초기 이민자들의 정착을 어렵게 하는 가장 큰 문제는 혼기를 넘긴 노총각들이었다. 남성이 여성보다 10배 이상 더 많았기 때문에 배우자를 구하기가 어려웠는데, 이를 해소하기 위한 궁여지책이 사진 결혼이었다. 남자가 자신의 사진을 한국으로 보내 여자가 마음에 들어 하면, 여자가 자신의 사진을 보낸다. 그러면 남자가 다시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여비 200달러를 보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없는 사진 결혼의 방식은 이랬다. 1910년부터 1924년까지 무려 951명의 사진 신부들이 결혼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갔다. 사진만 보고 결혼을 하다 보니 그들의 평균 나이 차이는 15살이나 되었는데, 이민 가기 전에 찍은 남성들의 사진이 이미 10~20년 지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랑들은 대부분 이민 올 당시의 사진을 보내고, 또 자신의 무식을 감추려고 편지를 대필시켰는데, 이것만 믿고 온 신부들은 신랑이 노인임을 알고는 실망,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는 터라 마음에 없는 결혼을 한 후 밤마다 눈물로 지새웠고, 심지어는 목숨을 끊은 여자도 있었다.
- 호놀룰루 이민 2세 로즈 최 여사의 회고
하와이 이민이 시작된 이후 곧 멕시코로의 이민도 시작되었다. 1905년 새로운 삶을 기대하고 1,033명의 한국인들은 인천 제물포를 출발하여 멕시코의 남부 살리나크루즈 항구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은 유카탄 반도의 불볕더위와 난생 처음 보는 에네켄(Henequén) 밭이었다. 에네켄은 선인장과에 속하는 용설란의 일종으로, 에네켄 잎을 잘라서 으깨면 흰 실타래가 되는데 이것을 묶어 선박용 로프나 마대용 자루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멕시코에 도착한 한국인들은 30여 개의 에네켄 농장으로 흩어져 4년간 혹독한 강제노동을 해야만 했다. 이 농장에서 일했던 최병덕 선생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일하기 시작한 첫날부터 우리들의 손이 엉망이 되었는데, 특히 왼손은 에네켄 가시에 찔리고 긁혀 하루도 피가 멈출 날이 없었다. 발가락부터 무릎까지 온통 가시에 찔려 항상 몸이 엉망진창이 됐으며, 가시가 엉켜 붙은 채 집에 돌아와서는 가시를 빼고 상처를 만졌다.
감독들은 일을 느리게 한다거나 잘못한다고 하여 채찍으로 때리기 일쑤였다. 이와 같이 냉혹한 현실 속에서 우리들은 심각한 언어 장애와 이질적인 문화로 상당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 에네켄 농장 노동자 최병덕 선생의 회고
1909년 5월 4년간의 노동 계약이 끝나고 드디어 해방되었지만, 내란과 혁명으로 혼란스러운 멕시코의 정세와 이듬해 조국의 국권 피탈을 맞으며 일부만 한국으로 복귀했을 뿐, 대다수의 인원은 멕시코에 정착하였다. 이주민 중 288명은 다시 쿠바로 재이민을 가게 되었다. 당시 쿠바는 사탕수수 생산지로 급성장하면서 대량의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상대적으로 임금도 높고, 이미 해상교통도 연결되어 있고, 같은 스페인어 문화권이라 적응하기도 쉬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959년 일어난 쿠바혁명으로 사회주의 국가가 들어서면서 외부와의 교류가 단절되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이어가기는 힘들게 되었다. 쿠바의 한국인 후손들은 주로 원주민과 결혼하면서 뿌리를 잊은 채 동화되어 갔고, 쿠바의 코레아노가 되었다.
오른쪽 도서는 1954년 발간된 책으로, 1921년 18세의 나이에 어머니와 함께 쿠바로 이민을 떠났던 임천택 선생의 이민생활을 엮은 책이다. 그는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인물이다.
일부 국가의 내용만 다룰 수 없어 두 편으로 나누어 작성한다. 2부에서는 중앙아시아로의 강제 이주, 독일 이민, 남미 이민 등의 역사를 이어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