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부터 파독 근로자까지 20세기 디아스포라

#016. [인천] 한국이민사박물관_2편

by Muse u mad

1편에서는 조선 후기 만주와 연해주로의 이주, 일본의 강제징용, 최초의 공식 이민이었던 하와이 이주, 멕시코와 쿠바로의 이주에 대해 다루었다. 2편에서는 1930년대 이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역사, 일본에 의해 사할린으로 강제이주된 후 돌아오지 못한 역사, 산업역군으로 독일과 남미에 진출했던 자발적 이주의 역사에 대해 다뤄볼 예정이다.

2023년 기준으로 재외동포는 193개국에 총 708만 명이 분포하고 있다.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 한국인이 없는 곳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현재는 대부분이 취업과 사업, 유학 목적의 자발적 이주인만큼 과거 강제이주된 역사,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주했던 역사를 되돌아보면 감개무량할 뿐이다.

재외동포 현황.png 전 세계 재외동포 현황 (출처: 재외동포청)



한 줄 요약

✔️ 연해주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와 사할린 동포의 비극, 남미 이민자의 의류업 형성과 파독 근로자까지 20세기 한국인의 이민사를 돌아본다.


박물관 개요

✔️ 명칭: 한국이민사박물관

✔️ 홈페이지: https://www.incheon.go.kr/museum/MU040102 (인천광역시립박물관 홈페이지)

✔️ 주소: https://maps.app.goo.gl/y3CxZRJ7LsbqVjhFA



중앙아시아로 쫓겨난 고려인

연해주로 이주해 살던 한국인들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된 이유는 무엇일까? 소련은 1930년대 만주사변(1931) 등으로 만주 지역을 식민화하던 일본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러∙일전쟁에서 이미 한번 패배했던 경험 때문이었을까, 일본이 이 지역까지 점령할 수 있다는 우려에 휩싸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연해주의 한국인들이 독립운동을 지속해 일본의 심기를 자극하고 있다고 보았는데, 일본인과 한국인은 외모상으로 구별이 어렵다 보니 연해주에서 암약할 수 있는 일본인 첩자를 가려낼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연해주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의 규모가 커 향후 자치권을 요구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사전에 차단할 목적이 있었다. 실제로 강제이주가 시작된 이듬해인 1938년 포시에트 지역 공산당 간부였던 김 아파나시가 극동주를 소련에서 분리하기 위한 무장봉기를 획책한 혐의로 총살되기도 하였다. 마지막 이유는 당시 중앙아시아 지역에 줄어든 인구를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1920년대에 연해주에서 카자흐공화국으로 이주한 농업인들이 이미 벼농사를 성공시켰고, 중앙아시아의 농업 생산력을 향상하기 위해 고려인을 적합한 민족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목적으로 1937년 연해주 지역의 고려인들의 강제 이주는 시작되었다. 소련에 의하면, 총 36,448가구, 169,927명이 이주를 마쳤고, 이들 중 95,427명은 카자흐공화국으로, 73,990명은 우즈베크공화국으로, 89명은 타지크공화국으로, 421명은 키르기스공화국으로 배치되었다. 불과 한두 달여 만에 전광석화로 추진해 완료된 정책이었다. 이들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6,000km가 넘는 길을 약 30~40일 동안 이동하였는데, 너무나 열악한 환경 때문에 최소 수백 명이 넘는 고려인들이 기차 안에서 죽어나갔다. 1만 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추정하는 자료도 있으며,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질병과 기아로 세상을 떠난 사람까지 포함하면 강제이주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고려인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중앙아시아 각지에 자리 잡은 고려인들은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특유의 근면성으로 땅을 일구어 황무지를 옥토로 가꾸면서 농사에 성공하였고, 그들은 고려신문 발행과 고려극단 창설 등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1955년 흐루시초프는 고려인의 정치적∙법적 명예회복을 선언하였고, 그 결과 고려인들은 러시아인과 동일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즉 거주이전의 완전한 자유를 확보하게 되었고, 이후 다시는 강제이주가 일어나지 않았다. 현재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지역에는 약 40~50여만 명의 고려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1980년대 활동했던 락밴드 <키노>의 보컬인 빅토르 최는 러시아 및 동구권에서 가장 유명한 고려인이다.


조선인도 아니고 왜 고려인이라 했을까?

러시아인들에게는 조선보다 고려라는 명칭이 이미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문 명칭이 Korea인 것처럼 이미 전 세계적으로는 고려로 불렸고, 러시아도 마찬가지로 조선인을 코레야네(Корейцы)라 칭하고 있었다. 19세기말부터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한 고려인들은 스스로를 고려사람이라 칭했고, 현지에서도 이를 그대로 음역해 Корё-сарам으로 표기해 사용하였다. 이를 영어로 표기하면 Koryo-saram이다.
1994년 방송된 드라마 <까레이스키> 덕분에 우리는 고려인을 러시아어로 까레이스키(корeйский)라 알고 있다. 하지만 이는 '고려의', '고려인'이란 뜻의 형용사로 잘못된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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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고려인의 강제이주 경로(출처: 위키미디어) / (우) 고려극단의 연극 <37년 뜨란지트> 포스터




반 세기 넘게 돌아오지 못했던 사할린 이주민

사할린은 러시아의 영토였으나, 러∙일전쟁(1905)에서 승리한 일본은 북위 50도 이남의 남사할린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사할린은 척박한 기후로 사람이 거주하기에는 힘겨운 곳이지만, 석탄 등 자원이 풍부해 광산업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당시 일본은 소련과의 국경지대이자 태평양 방어의 전략 거점인 사할린 지역을 사수할 필요성이 있었고, 군대로 징집된 인원이 늘어나면서 사할린의 탄광, 벌목장, 군수공장 등에서 일할 노동력이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일본은 또다시 강제이주를 감행하였다. 처음에는 일반적인 모집으로 시작했으나, 원하는 만큼의 노동력이 징집되지 않자 일본 정부에 의한 조직적 알선 및 강제징용으로 이어졌고, 1945년까지 총 43,000여 명이 사할린으로 끌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사할린에서 일본으로 물자를 운반하는 것이 힘들다는 이유로 1944년에는 약 1만 명의 한국인을 일본 규슈로 다시 강제이주했는데, 이때 이주한 인원들의 생사는 아직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사할린의 일본인들은 고국으로 돌아갔으나, 한국인들은 더 이상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일본 정부도 방치하였고, 광복 후 송환 여력조차 없던 한국 정부도 이들을 방치하였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소련과 대한민국은 적대관계였기 때문에 정부 간 교섭도 불가하였고, 사할린의 한국인들은 무국적자로 어려운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사할린 이주민의 90%가 남한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대한민국으로의 귀환을 구소련, 일본, 대한민국 정부에 직접 요구하였다. 이러한 한인들을 대표하는 단체 중 하나가 1958년 결성된 '화태억류귀환 한국인회'이다. 화태(花台)는 중국 랴오닝성 다롄시 외곽 지역을 의미하는데, 1945년 일본의 패망 이후 만주, 사할린, 연해주 일대에서 강제동원되었던 한국인들이 소련에 억류되었던 지역이다. 이 단체는 사할린 한국인이 고향의 가족과 서로 편지를 교환할 수 있도록 하고, 약 7천 명의 귀국 희망자 명부를 작성하여 한국과 일본 정부에 조치를 요청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1988년 KBS에서는 '사할린 동포에게'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하였고, 북한 외에도 이산가족 문제를 수면 위로 올리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90년 소련과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1992년부터 사할린 동포 1세대 영주 귀국 사업이 시작되었고, 현재까지 약 4,700여 명이 귀환하였다. 하지만 1945년 8월 15일 이전 이주자 및 본인과 배우자에 한정되어 영주 귀국은 또 다른 이산을 만들기도 하였다. 현재도 사할린에는 약 3만여 명의 동포들이 거주하고 있다. 2024년에는 '사할린 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정부차원에서 정착 및 생활안정 지원을 하고 있다.

참고로 사할린 동포들은 고려인으로 부르지 않는다.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당시 연해주 이주민들은 지금의 북한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넘어갔던 사람들인 반면, 사할린 동포들은 대부분 남한 출신이고 1930년대 말부터 강제이주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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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2014년 기준 사할린 동포 현황(출처: 한겨레신문) / (우) 2024년부터 시행 중인 사할린 동포 지원정책(출처: 재외동포청)




일본으로부터의 해방과 6.25 전쟁 이후, 먹고살아야 할 길이 막막해진 사람들은 자발적 해외 이민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국가로부터 허가를 받지 않은 채 개별적인 해외 이주가 늘어나자 박정희 정권은 1962년 해외이민법을 제정하여 해외이민을 제도권 안으로 편입하였다. 인구는 많았지만 일자리는 부족했고 외화벌이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남미의 의류사업을 책임지는 한국인

정부가 가장 먼저 해외 이민을 시도한 국가는 브라질이었다. 넓은 영토와 풍부한 자원은 있지만 노동력이 부족하여 이민 유치에 적극적이었고, 일본의 브라질 이민 성공사례가 국내에서도 적지 않은 관심을 모았기 때문이었다. 해외이민법을 근거로 1963년 12월 한국인농업이민단 103가구(약 370명)가 처음으로 이주하였다. 학생과 군악대까지 동원하며 환송행사를 열어주는 등 정부 차원의 배려가 많았다. 이후 1965년, 1970년에 2차, 3차 농업이민단이 이주하여 1975년에는 브라질 내 한국인 이민자 수가 7천여 명을 넘어섰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중남미 전역으로 확대되어 1964년 볼리비아, 1965년 파라과이와 아르헨티나, 1969년 칠레, 1972년 우루과이, 1974년 페루까지 다양한 국가로 진출하였다. 한국인들은 원래 농업 이민으로 남미에 갔지만, 정보 부족과 현지에서의 차별 등으로 대부분 농촌에서의 정착에 실패하면서 도시를 중심으로 정착하였고 그들만의 한인사회를 형성하였다.

농촌 정착에 실패한 이주자들이 도시에 정착하면서 선택한 업종은 봉제업이었다. 언어의 장벽과 자본의 부족에서도 뛰어난 손기술과 근면 성실함을 바탕으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직업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남미 한인사회의 주 업종이 의류업이 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브라질의 경우 약 5만 명의 교포 중 약 3만 명이 한인타운인 상파울루 봉헤찌로(Bom Retiro) 지역을 중심으로 의류 제조 및 도소매업에 종사하고 있다. 주상파울루 대한민국 총영사관에 따르면, 한국인 동포사회는 브라질 여성의류 시장의 약 60%를 차지하고 있으며, 봉헤찌로와 브라스(Brás) 지역 의류매장 중 약 2,000여 개가 우리 동포의 소유라고 한다. 아르헨티나에서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아베자네다(Avellaneda)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인 의류업체가 밀집해 있으며, 약 2만 명의 교민 중 약 80%가 의류 관련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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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브라질 이민 1세대 백옥빈 님의 40년간의 일기(1962~2004) / (우) 상파울루 봉헤찌로에 세워진 한인타운 상징물 'URI'




근대화의 주춧돌, 파독 광부와 간호사, 조선기술자

1960년대 한국의 실업률 해소와 외화 획득의 필요성, 독일의 부족한 노동인력 공급과 경제 원조라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닿으면서 정부 주도의 독일 이주가 본격화되었다. 1963년 247명의 1차 파독광부를 시작으로 1970년대 말까지 약 8천여 명의 광부들과 약 1만여 명의 간호사들이 독일로 떠났다. 1971년과 1972년에는 조선기술자 약 300여 명이 함부르크로 진출하였다. 이들이 보낸 송금액은 1965년부터 1975년까지 총 10억 달러 이상으로, 1965~1967년의 송금액의 경우 총수출액 대비 각각 1.6%, 1.9%, 1.8%를 차지할 정도였다. 하지만 워낙 중노동에 시달렸던지라 파독 근로자 중 광부 65명, 간호사 44명, 조선기술자 8명은 현지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1963년 한국 정부와 서독탄광협회가 '한국광부 해외고용계획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면서 한국 광부들의 독일 진출이 시작되었다. 당시 광부의 선발조건은 1년 이상 탄광 근무경력이 있는 사람이었으나, 실제로 광부경력이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경쟁률이 워낙 치열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소위 빽이 있는 고졸, 대졸 등 고학력자가 많았고, 그 외에도 사업가, 군전역자 등 여러 계층의 젊은이들이 새로운 꿈을 위해 독일행을 택했다. 독일에 도착한 광부들은 교육을 받고 채탄부, 굴전부, 잡부 등으로 배치되어 일을 하였다. 때때로 탄광에서는 각종 사고들로 인해 영원히 지상으로 올라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일을 시작할 때마다 무사히 다시 올라오자는 의미의 "글뤽 아우프(glück auf)"로 서로에게 인사하였다. 당시 독일의 외국인 노동자 대우는 놀랄 만큼 모범적이었다고 한다. 큰 차별과 핍박이 없었고, 다칠 경우에는 독일인과 동등하게 공상환자로 분류되어 100% 임금을 받기도 했다. 이런 선진적인 노동환경 때문이었을까, 파독광부의 60%는 독일에 남았고 이들은 유럽 한인사회의 중심이 되었다.

초기 간호사들의 독일 이주는 1950년대 말부터 기독교단체 등의 초청으로 독일로 건너간 여학생들이 현지의 간호학교를 다니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서 정식 교육과정을 받은 간호사, 간호조무사들이 독일에서 근무하던 한국 의사들의 중재로 독일로의 이주가 확대되었고, 1969년 양국의 '간호인력 고용에 대한 협약'이 체결되자 정부 주도로 본격화되었다. 파독 간호사들은 전문 간호업무뿐 아니라 간병인 역할까지 수행하는 고된 근무 속에서도 친절함과 성실함을 잃지 않아 독일 사람들로부터 동양에서 온 연꽃이라는 뜻의 '로투스 블루메(Lotus Blume)'로 불렸다고 한다. 간호사들도 계약기간 이후 계약을 연장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약 60%는 독일에 잔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인 조선기술자의 독일 진출은 1971년과 1972년에 세 차례에 걸쳐 약 300여 명이 독일 함부르크시에 있는 호발트(HDW) 조선소와 3년 근로계약을 체결하면서 이루어졌다. 당시 조선기술 지원자들은 호발트 조선소의 관계자들 입회하에 기능시험을 통해 선발되어 파견되었다. 한국인 기술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배상으로 서독이 영국에 돌려줄 5만 톤급 컨테이너선 건조에 참여하였고, 뛰어난 기술을 인정받아 유럽 인근 국가에도 파견근무를 하였다. 3년 노동계약이 만료된 후에는 대다수가 한국으로 돌아와 조선업계에서 활약하였다. 파독 조선기술자들은 광부나 간호사에 비해 규모는 작았지만, 한국 조선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한 산업역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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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파독 광부가 교육 수료 후 받은 독일 광부증 / 1979년 발간된 재독한국여성지 창간호 / 독일에서 입금한 송금 영수증




Epilogue. 남해군 독일마을

어린 시절 남해군 독일마을에 방문했던 기억이 있다. 유럽식의 단독주택이 모여 있는 곳이라 참 예쁘고 이색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유럽식 건축물이기 때문에 독일마을이라고 이름을 붙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이곳은 파독 근로자의 역사와 귀환 과정이 담긴 곳이다.

1960~1970년대에 독일로 떠나 잔류했던 이주자들은 1990년대 들어 대다수가 은퇴하면서 노년생활을 한국에서 보내고 싶어 했다. 이들은 귀국을 원했지만 한국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할 기반이 없는 상태였다. 이에 한국에 돌아와 살 수 있는 공동체 마을이 필요하다는 요구를 제기하였고, 지자체 중 남해군이 지역경제 활성화와 관광자원 개발을 위해 귀환 동포를 위한 거주·정착 단지를 조성하기로 결정하였다. 남해군이 부지를 선정하고, 2003년부터 정부지원과 교민의 자비를 더해 독일식 주택 건축이 시작되었다. 근대화 초기 산업역군에 대한 국가 차원의 대우가 이루어진 것이다. 초기 입주민은 물론 파독 근로자들이었지만, 현재는 관광지화 되어 일부 주택들만 귀환 교민들이 실거주하고 있고 다수는 펜션이나 게스트하우스, 레스토랑 등으로 전환되어 있다.


남해문화관광_0027_독일마을.jpg 남해 독일마을 (출처: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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