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 [말레이시아] Batu cave
이슬람 국가 말레이시아에는 아주 유명한 힌두교 사원이 존재한다. 쿠알라룸푸르의 바로 북쪽에 위치한 곰박(Gombak) 지역에 있는 바투 동굴(Batu Caves)이다. 석회암 동굴을 힌두교 사원으로 활용하는 곳으로, 동굴 속에 위치했다는 독특함과 그 앞에 서 있는 웅장한 동상, 272개에 이르는 형형색색의 계단, 비둘기가 점령한 동굴 앞 광장, 관광객을 노리는 원숭이들까지, 힌두교인이 아니더라도 눈길을 사로잡는 요소가 너무 많다. 볼거리도 훌륭하지만, 생애 첫 힌두교 사원의 방문이었고, 더욱이 이슬람 국가에 이렇게나 거대한 힌두교 사원이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신기했다. 그리고 이 사원에 타밀인의 이주 역사가 담겨있다는 얘기에 관심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 바투 동굴은 석회암 동굴, 무루간 동상, 형형색색의 계단으로 알려진 관광지일 뿐 아니라, 타밀 디아스포라의 역사와 공동체 정체성이 응축된 복합 문화유산이다.
✔️ 명칭: Batu Caves
✔️ 홈페이지: https://www.malaysia.travel/explore/batu-caves
✔️ 주소: https://maps.app.goo.gl/1KnEJZjcGTiniqJj7
사원 입구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높이 42.7m의 거대한 금빛 무루간(Murugan) 동상이다. 2006년에 완성되었으니 생각보다 신상품이다. 말레이시아 관광청에 따르면 이 조형물은 세계에서 가장 큰 무루간 신상이다. 동상과 함께 눈에 띄는 것은 4줄로 이루어진 형형색색의 272개 계단이다. 언제 다 오를까 싶지만, 관광객의 음식이나 소지품을 뺏기 위해 돌아다니는 원숭이들과 맨발로 그리고 무릎으로 계단을 오르는 힌두교인들을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꼭대기에 다다른다. 272개의 계단이 힌두교에서 말하는 인간이 지을 수 있는 죄의 수를 의미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공식 출처에서는 어디서도 확인할 수 없다. 힌두교 경전에도 272개의 죄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관광용 목적으로 의미를 부여한 것 아닌가 싶다. 알록달록한 계단도 처음 사원을 설계할 때가 아니라 2018년에 도색한 결과라고 한다. 문화유산 보존 절차를 준수하지 않았다는 논란까지 있었다고 하지만, 주변의 힌두교 사원 자체가 워낙 화려한 색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혀 이질감은 없다. 종교적 논란만 없다면 바투 동굴의 훌륭한 시각적 상징 역할을 그대로 유지하면 될 것 같다. 계단과 색에는 별다른 종교적 의미가 없지만, 관광객을 위한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은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고 가볍게 넘어가면 된다.
계단을 모두 올라가면, 동굴 속 실제 사원을 마주하게 된다. 약 1억 년 전에 형성된 석회암 동굴로, 수없이 많은 종유석과 석순은 물론, 자연적으로 형성된 천장의 구멍을 통해 햇빛이 동굴 내부로 들어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약 100m의 높이에서 쏟아지는 채광 덕분에 동굴 내부가 어둡지만은 않고, 종교적 장소인 만큼 성스러운 분위기까지 연출하고 있었다. 어둡고 침침한 동굴에 왜 사원을 세웠을까 궁금했지만, 막상 가보니 사원 건립에 꽤나 유리한 조건이었다.
이 힌두교 사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타밀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우선 타밀(Tamil)은 인도 남동부 최남단에 위치한 타밀주를 말하며, 여기에 사는 주민이 타밀인이다. 타밀어를 사용하고, 타밀 문화권이라 칭할 만큼 독자적인 공동체를 형성한 곳이다. 이곳은 고대부터 해상 교역이 활발해 동남아시아와 중동 지역을 잇는 중요한 교두보 역할을 해왔고, 동남아시아 지역에 힌두교를 전파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곳이다.
타밀인에게는 무루간이 가장 중요한 신이다. 힌두교에서는 보통 3대 신을 창조의 신 브라마(Brahma), 보존의 신 비슈누(Vishunu), 파괴와 재생의 신 시바(Shiva)로 꼽는데, 무루간은 이 3대 신에 포함되지 않는다. 힌두교 경전에서 무루간은 시바 신의 아들로, 용기와 전쟁을 상징한다. 북인도가 비슈누 계통 중심으로 발전했다면, 타밀 지역은 시바 계통이 신앙 구조의 중심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무루간이 타밀 문화권에서 매우 오래된 토착 신앙으로부터 기원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무루간은 타밀어로 불리는 이름이고, 고대 타밀 문학과 예술에서부터 무루간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무루간은 타밀인에게 원래부터 존재한 신이라는 인식이 있다. 그래서 타밀인들은 무루간을 타밀인의 신(Tamil Kadavul)이라 칭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전쟁과 이주가 많았던 타밀인들에게는 무루간이 의미하는 전쟁과 용기와도 맞닿아 있어 무루간을 공동체를 보호하는 수호자로 인식하게 되었다.
인도의 영국 식민지 시절인 19~20세기 사이 타밀인들은 동남아시아로 대거 이주했다. 동남아시아 지역의 대규모 고무 농장, 철도 건설, 항만 노동을 위해 영국은 지역적으로 가까이 있는 타밀인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미얀마 등지로 강제 이주시킨 것이다. 정확한 이주 규모는 찾을 수 없었지만, 약 400만 명의 인도인이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주민의 대부분이 타밀인이라고 한다. 그중 대부분은 본국으로 귀환했지만 상당수는 현지에 정착하였다. 정착한 이들은 타밀 공동체를 지속적으로 유지했고 현재는 말레이시아에만 약 230만 명 이상이 거주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알아야 힌두교 사원으로써의 바투 동굴 건립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원래 바투 동굴은 채석 활동을 하던 곳이었는데, 1891년 타밀 공동체의 지도자인 탐부사미 필라이(K. Thamboosamy Pillai)가 타밀인의 신앙 활동과 공동체 결속력 강화를 위해 사원 건립을 시작했다. 다음 해인 1892년부터 타이푸삼 축제를 이곳에서 열며 말레이시아에 거주하는 타밀 힌두교인들의 성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2006년에는 무루간 동상을 건립하고, 2018년에는 계단을 도색하면서 종교적 공간뿐 아니라 관광지로써의 기능까지 역할을 하고 있다.
바투 동굴은 오늘날 말레이시아 힌두교인의 신앙 중심지이다. 말레이시아에서 힌두교인의 비율은 약 6~7%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대부분이 타밀인이기 때문에 단순한 사원이 아니라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장소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갔을 때에는 관광객보다 더 많은 신도들이 있었다.
바투 동굴 계단을 오르는 동안, 무릎을 꿇은 채 한 계단씩 올라가는 힌두교인을 볼 수 있었다. 너무나 힘들어하는 신도와 두 명이 부축까지 하는 모습에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무루간 신에게 특정 행동을 약속하고,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의미의 행위라고 한다. 간절한 기도나 소망을 이루기 위해, 또는 이루어진 일에 대한 감사의 표시,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다짐을 했을 때 등이다. 힌두교인이 아닌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가혹한 행위처럼 보였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힌두교인들이 맨발로 계단을 오르기도 했고, 타이푸삼 축제 때에는 대형 구조물을 들고 계단을 오르는 카바디(Kavadi)라는 행위까지 있다고 하니 신앙의 다양성에 대해 다시금 경험하는 계기로 받아들였다. 그만큼 관광지로만 기능하는 공간이 아닌 힌두교의 성지로 역할하는 공간인 것이다.
이곳 바투 동굴에서는 매년 타이푸삼(Thaipusam)이라는 종교 행사가 열린다. 보통 1월 말에서 2월 초에 열리는데, 타밀 달력에서 Thai(1~2월)와 Pusam(푸삼 별자리)이 만나는 시기를 기념하는 것으로, 힌두 신화에서는 여신 파르바티가 무루간에게 악을 물리칠 신성한 창(vel)을 건네준 날로 기록한다. 이 때문에 타이푸삼은 정화, 속죄, 신성한 힘에 대한 기도를 의미한다. 이를 신체적 행위로 표현한 것이 카바디(Kavadi)라는 의식인데, 우유통을 들고 계단을 오르는 팔 카바디(Paal Kavadi), 신체에 피어싱을 하는 알라구 카바디(Alagu Kavadi), 수십 kg에 달하는 구조물을 메고 계단을 오르는 베르 카바디(Ver Kavadi) 등을 행한다고 한다. 이 축제 기간에만 최소 수십만 명의 힌두교인이 바투 동굴을 찾으며, 해외에서도 방문하기 때문에 말레이시아는 정부 차원에서 큰 관광상품으로 채택하고 홍보하고 있다. 언젠가 다시 한번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타밀 문화를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 타이푸삼 기간을 선택해야 할 것 같다.
바투 동굴은 동굴에 지은 힌두교 사원, 엄청난 규모의 무루간 동상, 형형색색의 계단 등등 훌륭한 관광 자원인 동시에, 타밀인의 이주 역사와 강제 노동의 기억을 품은 복합 문화유산이다. 무엇보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힌두교 타밀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시키는 종교적, 문화적 상징물이기도 하다. 여전히 종교적 분쟁이 큰 지구촌 사회에서 동남아시아의 종교적 다양성 조화는 언제 보아도 놀라운 사실이다.
Epilogue
바투 동굴을 방문할 때에는 원숭이를 조심해야 한다. 동남아시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원숭이이지만, 힌두교인도 관광객도 워낙 많다 보니 먹을거리는 물론, 소지품까지 노리고 순식간에 달려들 수 있으니 주의하길 바란다. 물론 겁낼 필요는 전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