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보다 달리기가 좋은 사람
2024년 4월 21일 일요일
3개월 전의 내가 신청했던 마라톤을 오늘의 내가 뛰어내는 경험을 하고 왔습니다.
대회를 신청하기 전엔 신중하게 생각하고.. 신청하도록 합시다. (특히 참가비가 6만 원이라면)
1년을 매일같이 운동했던 친구와 나갔던 첫 10km 대회
오늘의 기억이 다 가기 전에 글로 남겨봅니다!
전날 하루 종일 쏟아내린 봄비 덕분에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맑았습니다.
대회장에 가는 길에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날씨 좋다는 말을 연신 내뱉게 되는 하루였습니다.
해가 내리쬐지 않는 선선한 날씨도 대회장을 찾은 사람들의 기분을 맑게 해주는 듯했습니다.
대회가 시작하기 전 대회장 주변은 웃음소리와 인사 소리, 대회장을 통제하는 진행자의 마이크 소리로 시끌벅적합니다.
일요일 오전 7시 전국에서 가장 왁자지껄한 곳은 고양종합운동장 일 겁니다.
사람들은 멀리서 온 친구들을 반기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인사를 건네느라 연신 웃음을 짓고 악수를 합니다.
티 없이 맑은 표정으로 오로지 달리기를 위해 모인 사람들, 그들이 모여 뿜어내는 에너지는 주말 새벽의 졸음을 다 쫓아냅니다.
가벼운 스트레칭과 조깅으로 몸을 푼 우리는 10km b 그룹 출발선에 가 기다렸습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후발 그룹일 경우 몸을 풀고 나서의 대기 시간이 너무 길 수 있으니 조깅 시간을 잘 설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7시 30분에 조깅을 해서 몸을 데웠지만, 하프코스, 10km a 그룹이 출발하고 우리 차례가 되었을 땐 8시 20분이 다 되었습니다.
여하튼,
대회 직전에 충분한 거리를 뛰어보지 못한 것과,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했던 것, 전날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한 것, 화장실을 들르지 못한 것, 테이핑을 잘라오지 않은 것, 휴대폰을 보관함에 맡겨버려 사진을 찍지 못하는 것 등등.. 출발선을 앞에 두니 수만 가지 후회가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더 좋은 컨디션으로 대회를 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잡생각이 무겁게 두 어깨를 짓누릅니다.
그런데,
진행자가 마이크에 대고 다 같이 카운트다운을 하자고 소리칩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오른손을 높이 들고, 직접 다섯을 세고 출발하자는 겁니다.
오른손을 높이 들고, 우릴 둘러싼 수백 명의 친구들과 카운트다운을 하자니
이전의 후회와 고민들은 하늘로 날아간 건지 트랙 속으로 들어간 건지,
이제 한 시간을 내리뛰어야 할 나의 두 발과, 쉼 없이 박동할 심장소리만 남았습니다.
일주일 전부터 신경 쓰였던 왼쪽 무릎의 통증과 허리의 뻐근함은 다 가고,
우리 앞에 놓인 10km가 머릿속에 가득합니다.
사실 출발선을 지나고부턴,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함께 갔던 친구와는 서로의 페이스가 다른 탓에, 진즉에 각자의 달리기를 하기로 약속을 했고,
그렇게 혼자만의 달리기가 시작됐습니다.
다만 정말 혼자 달렸던 과거의 달리기와는 달리,
대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내 곁을 함께 합니다.
언젠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고 쓴 글에서, 달리며 산책하는 사람들 사이를 거슬러 오르는 연어가 된 기분을 즐긴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회에서 우린 연어 대가족 대이동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수천 명의 연어들이 내 사방에서 뛰고 있습니다.
개중에는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대회에 나온 아빠와 엄마도 있고,
그들의 완주를 돕는 보조자와 끈으로 손을 묶고 달리는 시각장애인도 있습니다.
(이분들에게 '파이팅!'을 외치면 더욱 희망찬 파이팅을 되돌려 주십니다.)
130cm 남짓한 아이들도, 다 큰 어른들도 자기 품에 배번을 안고 결승점을 향해 달려갑니다.
3km쯤 안되어 등장하는 첫 번째 반환점을 지나자,
하나 둘 걷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전날 먹었던 부대찌개가 얹혔거나, 화장실을 미쳐 못 갔거나, 종아리가 터질 것 같다던가, 호흡이 터질 것 같다던가,
각자 나름의 이유로 잠시 쉬어가는 듯 보였습니다.
5km 지점 등장한 급수대를 지날 땐,
파이팅을 외쳐주는 봉사자들과 그들이 건네주는 물이 정말 꿀처럼 달았습니다.
(사실 5분 30초의 페이스로 달리면서 종이컵에 들어있는 물을 마시기는 불가능합니다. 얼굴에 물을 다 붓고, 입으로 들어간 양만큼만 마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합니다.)
몇 모금 안되는 그 물이 남은 5km를 시작하는 힘의 원천이 되어주는 듯합니다.
다들 물을 머리에 붓기도 하고, 머금었다가 뱉기도 하며 파이팅을 외칩니다.
7km 즈음 등장한 2번째 반환점은,
10km를 달렸던 주자들에게 어떤 감상으로 다가왔을지 묻고 싶습니다.
저의 경우는,
이제 쭉 뻗은 직선주로만 달리면 완주이니 남은 호흡과 체력을 다 써버리자.
죽고 싶다.
정도였습니다.
이미 7km를 달려왔으니 체력은 바닥에 가까운 상태이니 남은 3km는 나와의 싸움이었습니다.
물론, 당연히, 명명백백히 그 자리에서 멈춰 걸어가는 것이 그 당시엔 편한 선택일 것입니다.
하지만 달려온 7km와 남은 3km를 비교했을 때, 숨도 다 트였고, 몸도 다 풀렸으니 마저 뛰는 것도 나쁠 건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달려온 페이스보다 더 빠른 속도로, 급해진 호흡으로
내 앞에 있는 저 사람만 제낀다. 내 눈에 보이는 사람들은 다 제끼겠다는 생각으로 남은 직선주로를 달리기로 합니다.
(말 그대로 제끼고 싶었습니다. '추월' 한다던가 '제친' 다던가 하는 표현으론 남은 3km를 이겨낼 수 없습니다.)
마지막 직선 주로인 만큼, 큰소리로 응원하는 목소리도 도로 양옆에 가득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응원은,
주자들의 매번 표를 보고 이름을 크게 불러주며
"000씨 파이팅! 다 왔어!" 하고 외쳐주던 아저씨입니다. 이름을 외쳐주며 하이파이브까지 해주십니다.
내 배에 붙어있는지 어디 떨어졌는지도 모를 매번 표에 붙은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게 그렇게 큰 힘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이가 난생처음 보는 이의 이름을 외치며 전하는 티없는 응원이 세상 어떤 영양제보다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직선주로를 다 달리고 나면,
고양종합운동장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나왔던 길로 다시 들어가면서 터널을 지날 때 나에게 하는 마지막 파이팅을 외쳐 봅니다.
(무언의 약속이라도 한 듯, 달리는 도중 터널을 지나면 다들 파이팅을 외칩니다. 터널 천장에 부딪힌 파이팅이 나에게도 다시 닿습니다.)
터널을 지나 종합운동장 안으로 들어서면
붉은 트랙과 푸른 천연잔디, 맑은 하늘과 수많은 사람들이 우릴 반깁니다.
남은 트랙 한 바퀴, 400m에 모든 걸 내놓을 준비가 된 상태였습니다.
이번에도 내 앞에 선 사람들은 다 제낀다는 생각으로 질주해 봅니다.
마침내 결승선에 도달하면,
드디어 해냈다, 마침내 도달했다, 뿌듯하다
하는 감정은 없습니다.
굉장히 힘들고, 습습 후후하고 내뱉었던 호흡과 그 속도로 뛰는 심장박동을 안정 시키는데 온 정신이 다 갑니다.
결승점에 침대가 있었다면 아마 내일 아침에 일어났을 것입니다.
호흡이 좀 잦아들고, 심장 박동 소리가 희미해져 갈 때쯤
뒤늦게 그들의 달리기를 마무리하는 사람들도 눈에 들어오고,
그들을 응원하는 가족들의 응원소리도 귀에 들어옵니다.
이때쯤 되니 뿌듯하기도 하고, 내심 자랑스럽기도 합니다.
달리기를 마치고 나면 다들 메달도 받고, 간식도 받고, 사진도 찍고,
달릴 때보다 더 즐겁게 그들의 달리기를 기록합니다.
인사와 웃음소리로 가득했던 이곳은
계단을 내려갈 때의 신음 소리와 파스 소리로 매워졌지만,
사람들은 미소 짓고 있었습니다.
기록에 대한 아쉬움을 말하는 사람도 있고, 당기는 햄스트링에 파스를 뿌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들 웃고 있고, 옆 사람과 농담을 주고받습니다.
달리기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합니다.
최종 기록은 55분 11초
평균 페이스는 km당 5분 31초 페이스
기록에 대한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더 훈련하고 더 조절했으면 40분대의 기록도 달성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태껏 뛰었던 10km 기록 중 가장 좋은 기록이고,
달리는 내내 퍼지는 느낌 없이 상쾌한 기분으로 뛰어서 후회 없는 달리기였습니다.
페이스가 늦춰진 적도 없고, 스스로 정한 기준에도 부합하는 55분간의 러닝이었습니다.
달리기가 우리에게 주는 긍정적인 효과가 궁금하다면,
마라톤 대회장에 가보는 것은 어떨까 합니다.
달리는 사람들은
뛰기 전에도, 뛰는 중에도, 뛰고 나서도 웃음을 잃지 않습니다.
뛴다고 돈 주는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들 기쁜지, 행복한지, 서로 응원하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계속 뛰어보려고 합니다.
왜 매번 뛸 때마다 기쁘고 즐거운지, 난생처음 보는 사람이랑도 기쁘게 대화를 나누게 하는지,
마라톤을 열 번은 나가봐야 겨우 글로 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안양천을 백 번은 뛰어봐야 겨우 말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죽을 때까지 알 수 없대도, 달리기는 할 겁니다.
오늘 고양에서 함께 한 친구들도 다들 그렇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