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by 티후

"제가 걷지를 못해서 가을 맞이가 좀 버겁습니다. 원래 좀 선선해졌다 하면 요란띡띡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길에서 주워온 예쁜 돌맹이 같은 이야기들 잘 닦아내고 삶아서 오당기로 찍어냈는데요. 연휴 내내 집에만 있다 보니 이러다 가을 다 가겠다 싶어서 결정했습니다." -문상훈. 빠더너스 유튜브 커뮤니티에서.



가을 향기가 나는, 아름다운 문장이다. 내가 초등학생 시절 애지중지 키웠던 구피도, 문상훈이 한글을 대하는 만큼 사랑받진 못했을 것이다. 문상훈이 한글을 사랑하는 만큼이나 사랑하는 계절 가을, 내가 문상훈을 사랑하는 만큼 아끼는, 이 계절을 우린 왜 사랑할까



가을이 되면 세상은 볼거리로 가득 하다. 흔히 가을은 패션의 계절이라고들 한다. 사람들은 더운 여름 입지 못했던 따스한 색감의 가을옷을 꺼내 입고, 가을 시즌에 맞추어 발매되는 옷들을 장바구니에 담기도 한다. 날이 서늘해진 덕분에, 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을 구경하는 재미가 가득하다. 옷을 갈아 입는 건 사람 뿐만이 아니다. 길가에 늘어선 가로수, 곳곳에 높이 솟은 서울의 산들도 빨강, 주황, 노랑으로 붉게 물든다. 별달리 가을이 왔다고 누가 소리 치지 않는다. 거리의 전광판에 가을이 왔음을 알리지 않는다. 뉴스 속 아나운서가 가을의 시작을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치맛자락을 붉게 물들이는 가을의 산과, 유달리 가을을 빨리 맞이하는 몇몇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을이 왔음을 조용히 알릴 뿐이다.



가을의 향기는, 그 어떤 계절의 향기보다 따스하다. 황사와 미세먼지가 가득한 봄, 덥고 습한 공기와 땀냄새로 뒤덮인 여름, 차가운 공기가 콧속을 다 얼리는 겨울. 이들의 향기는 가을의 향기를 이기기 어려워 보인다. 올해 장사를 개시하는 붕어빵, 호떡 트럭들이 풍기는 단내가 선선한 바람을 타고 온다. 마트 앞 군고구마 기계가 노랗게 익은 고구마 향기를 뿜어 낸다. 가로수 은행나무 아래 터져있는 은행은 정겨운 꼬린내를 풍긴다. (이 냄새까지 즐기진 못한다.) 사계절중, 마음 놓고 크게 숨을 들이 쉴 수 있는 계절은 가을 혼자이다.



적당히 쌀쌀한 가을의 날씨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나처럼 온몸에 열이 가득한 사람들에겐 반팔 한장에 겉옷 한장 걸치고 나갈 수 있는 가을이 너무 고맙다. 뜨거운 국밥을 먹거나, 만원 버스에 올라타 학교를 갈때면 계절에 상관없이 땀방울이 맺힌다. 식당의 문 밖을 나설때, 만원 버스에서 내릴 때 불어오는 가을의 시원한 바람은 한 여름의 에어컨이 주는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달리기를 할 때 불어오는 선선한 가을 바람은 나의 등을 밀어주는 기분 좋은 친구가 되어주기도 한다.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은 가을의 온도가 가을을 사랑하게 한다.



가을이 내게 주는 선물 중 가장 만족스러운 걸 고르라면, 단연 가을의 소리이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덕에, 광화문은 언제나 즐거운 행사로 붐빈다. 행사를 즐기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행사를 진행하는 진행자의 우스갯소리 같은 즐거운 소리가 광화문을 더욱 다채롭게 한다. 가을이 되면, 가을의 음악을 찾아 듣게 된다. 붉게 물든 단풍과 선선한 바람이 그렇게 이끄는듯 하다. 예쁜 돌맹이들을 잘 주워다 닦아내고 삶아낸 듯한 가사를 들려주는 김광석, 유재하, 이문세 같은 음유시인들의 음악과, 미처 다 이해하지 못하는 영어 가사들이지만 악기가 전하는 음율이 너무 아름다운 마일스 데이비스, 빌 에반스 같은 재즈 시인들의 음악은 그 자체로 나의 귀를 기쁘게 만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반갑게 느껴지는 소리는, 길거리에 쌓인 낙엽을 밟는 소리이다. 언제는 바삭거리기도 하고, 또 어떨땐 무언가 속삭이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소리는 때로 두 귀에 꽂은 블루투스 이어폰이 주는 노이즈 캔슬링보다 더 효과 좋은 노이즈 캔슬링이 되어준다.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은 가을의 온도가 우릴 감싼다. 늘 축제 분위기인 겨울로 가는 길목, 연말을 앞두고 설레는 기분과 일년이 또 이렇게 지났다는 허탈함이 묘하게 공존하는, 가을의 선선한 기운을 우리는 즐긴다. 너무 행복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슬프지도 않은, 가을의 감정이 우릴 흥미롭게 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여름과 겨울 사이에 끼어 잠시 얼굴을 비추고 가는 가을의 모습이 마치 우리의 인생 같아 가을을 사랑하는게 아닐까. '너'도 '우리'도 아니고 '나'로써 살아가는 우리가, 여름도 겨울도 아닌 것이 한 철 아름다움을 다 뽐내고 지나가는 가을에게 사랑을 느끼는 건 당연한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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