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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앎 Jan 18. 2023

대학원이라는 선택

  여름날이었다. 인근 지역에 살면서 지나치기만 했던 W대학교 치과대학 앞에 도착했다. 이제 막 지어진 신식 대학병원 건물 바로 옆, 상대적으로 오래된 흰색의 4층 건물은 더 눈에 띄었다. 여기저기 금이 간 외관은 장례식장에 가까운 느낌이었고 서늘한 분위기였다. 그 느낌이 내부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 여름이었지만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내부는 바깥 온도와 다르게 제법 차가운 공기로 채워져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나의 대학원 생활을 암시하는 것이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다.      


  2층으로 올라가 건물 끝 계단 바로 옆에 위치한 실험실 문을 열었다. 대학원생 신분으로 처음 출근한 날이다. 앞으로 함께 생활할 선배는 단 한 명이었다. 그녀는 미리 와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낯선 사람이 들어와도 신경을 쓰지 않을 만큼 무척 분주하게 움직였다. 살갑게 인사를 건네었지만 생각보다 돌아오는 인사는 무심했다. 신경 쓸 겨를이 없었나 보다 생각했지만 실험실 생활을 하면서 그게 그녀의 성향이라는 것을 파악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첫날 오전에는 매일 등하교를 책임질 스쿨버스를 알아보고 각종 입학준비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점심 식사는 지도교수와 유일한 선배인 그녀, 나 이렇게 셋이 외식으로 함께 했다. 감자탕 집이었는데 어색한 분위기에서 음식이 무슨 맛이었는지, 어떻게 먹었는지 모르게 식사를 끝냈다. 교수와 함께 있는 내내 선배는 말로만 듣던 대학원생의 사회생활을 능숙하게 선보였다. 마치 너도 앞으로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듯 모든 것이 시범과도 같았다. 오후에도 선배의 시범 교육은 이어졌다. 태어난 지 2주 된 Rat의 중추신경인 척수(spinal cord)를 적출하는 방법부터 척수조각에 있는 신경세포의 세포막 전류를 기록하는 실험법까지, 처음 듣는 전문용어를 사용하며 실험을 지켜보게 했다. 냉소적인 분위기로 앞으로 어떤 것들을 기억하고 따라야 하는지 설명했지만 뭐가 뭔지 하나도 몰랐다. 놓치지 않고 메모하고 외우느라 그저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 선배와는 친해지기 어렵겠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인지했던 것 같다.    

  

  시간은 저녁 7시가 다 되어 갔고 당연하게 집으로 갈 준비를 했다. 같이 저녁을 먹자는 교수의 말이 호의라고 생각했던 순진함은 정중하게 거절하는 대범함을 낳았다. 그날 이후로 매일 저녁을 같이 먹는 것은 밤늦은 시간까지 연구실에서 있어야 한다는 암시였음을 뒤늦게 눈치챘다. 그 후로 출근은 있어도 퇴근이 없는, 공휴일이 없는 일상이 계속되었지만 참을 만했다. 나를 위한 노력의 가치를 생각하며 오기로 독하게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집안의 대소사, 예를 들어 동생의 결혼이나 아빠의 환갑을 기념하는 자리에 손님처럼 참석하는 것조차 눈치를 봐야 하는 일상은 가족에게 미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7년 동안 가족은 장녀를 잃어버린 채 나의 귀환을 기다려야 했다. 매일을 피곤과 스트레스에 절여져서 살았던 만큼 짜증도 많이 부렸다. 가족은 죄 없이 감정쓰레기통이 되어 갔고 스스로 감정에 파묻혀 이기적인 사람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았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뒤통수라도 치고 학교 그만두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때 당시에는 열망이 누구도 말리지 못할 만큼 강했다. 성공에 대한 열망과 바꿔치기 한 일상의 상실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소속된 랩은 진정한 내부인이 되고 나서 보니 생각보다 더 열악했다. 50대에 접어선 지도교수는 자신이 의무적으로 이행할 연구업적을 유지하기만 할 뿐 그 이상의 연구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학회를 참석하는 것도 거의 드물었고 언제나 연구실 자리를 지키며 학교의 보직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당연히 국가에서 지원하는 연구비 혜택도 우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학원생에게 랩이라는 환경은 생각보다 인생을 좌지우지할 만큼 중요하다. 지내온 7년은 생각을 바꾸고 성격을 개조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지도교수가 보인 학자로서의 수동적인 태도는 지도를 받는 대학원생에게도 여실히 전달되었다. 창의적인 발상과 새로운 생각은 늘 꽁꽁 묶여 있었다. 그저 하라는 대로 해야 하는, 수동적인 인간으로 사는 것만이 허락되었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 주길 바라는 마음만 간신히 살아 꿈틀거렸다.      


  때로는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실험을 대신해주기도 했고, 실험 데이터를 정리하고 그래프를 만드는 일도 해야 했다. 몇 주가 지나면 데이터의 주인이 나타나 수고의 대가를 지불하듯 회식을 시켜주기도 했다. 그런 것들이 부당한 일이라는 것은 야무지게 가스라이팅 당하느라 석사과정이 끝날 때까지 몰랐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오로지 꿈만 꾸는 무지하고 순진한 대학원생이 노예로 전하는 것은 생각보다 참 쉬운 일이었다. 박사과정이던 선배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알면서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게 내색하지 않고 모른 척했다. 공부가 하고 싶어서 들어온 학업의 장에서 사회의 어둡고 더러운 정치를 배운 그녀가 늘 짜증이 많았던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 쌓아온 실험 결과와 연구 업적을 포기하고 떠난다는 것은 지난 시간과 고생 버리는 것과도 같았다. 그렇게 박차고 나갈 용기가 없었던 우리는 성실하게 박사학위까지 취득하고 그곳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대학원생의 삶이란 학생증 이용기간을 연장하는 것과 자유를 바꿔치기하는 것과도 같은 것일까. 종종 사람들은 대한민국에서 대학원에 들어가는 것은 감옥에 가는 것과 같이 비유하곤 한다. 교수에게 잘 보여서 연구실로 초대되면 대학원행이라느니, 교수가 유독 학생에게 친절하면 자칫 대학원생이 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느니 그런 농담이 괜히 나온 말은 아닐 것이다. 석사학위는 2년, 박사학위는 운이 좋으면 3년, 아니면 상황에 따라서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을 들여 겨우 취득하는 경우도 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입학하는 경우는 젊은 날 청춘을 바치는 것과도 다름없기 때문에 무턱대 빛 좋은 개살구로 생각해서 입학하면 경제적·시간적·육체적·정신적 손해를 볼 수 있다. 그러니 감옥이라는 말도 나올 법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원이 감옥살이가 되지 않으려면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을 찾은 후 결정해야 한다. 자신이 왜 대학원에 가야 하는지, 대학원에서 어떤 연구와 학문을 깊게 파고들 것인지, 교수는 어떤 연구를 하고 얼마나 활동적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지, 소속된 대학원생과 연구원은 얼마나 있는지 등 샅샅이 알아보고 고민하고 결정해야 한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대학원생의 불행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포기가 쉽지 않은 대학원생의 시간은 사람을 변하게 하고 인생을 변하게 하므로 신중하게 모든 정보를 얻고 다시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쓴 글이다. 당신은 부디 존경하는 교수와 함께, 선망하는 선배와 함께 공부하며 인생의 꿈을 키워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대학원생이 행복한 삶을 살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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