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과대학 5층 구석진 곳,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면 또 다른 문이 나온다. 실험에 희생될 Rat*이 있는 곳이다. 사육실로 들어가기 전, 마스크는 꼼꼼하게 눌러주고 글러브 착용도 빼먹지 않는다. 심호흡 한번 하고 문을 열면 스물다섯 개의 사육 케이지가 층층이 쌓여 있다. 안에는 깔짚이 깔려있고 한 쌍의 암수 Rat이 교배를 목적으로 짝지어 있거나 어미가 열 마리 내외의 새끼들과 함께 섞여 있다.
여름에는 일주일에 2회, 봄, 가을, 겨울에는 요일을 지정해서 1회, 쥐 배설물이 뿜어내는 코를 찌르는 냄새는 생각보다 심하고 오래 방치하면 비위생적이기 때문에 꼭 청소를 한다.
나는 7년을 대학원생으로 지내면서 빠짐없이 사육장 청소를 손수 처리했다. 자동으로 세척되는 신식 사육 케이지는 연구비가 턱없이 부족했던 우리 랩에서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불평불만은 정신력을 갉아먹기만 할 뿐이다. 최대한 신속하고 깨끗하게 배설물이 섞인 깔짚을 긁어내고 세척하는 것이 오히려 정신건강에 이로웠다.
여름이면 사육장은 덥고 습했다.
장갑을 낀 손에 배설물이 범벅이 되면 땀을 닦을 수 없었다. 땀이 눈으로 흘러들어 가도 제대로 닦지도 못하면서 더위와 사투를 벌이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더럽고 힘든 일이다. 그런데 나에게 사육장 청소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희생되었거나 앞으로 희생될 Rat을 향한 죄책감을 사죄하는 의식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희생되는 숫자가 늘어나면 혼자만의 추모제는 더 자주 치러지고는 했다. 그렇게라도 마음을 억누르는 무거운 짐을 덜어내야 동물실험을 지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루는 인근에 위치한 중학교에서 남학생 6명이 랩으로 찾아왔다. 체험학습으로 동물 해부를 위한 방문이었다.
Rat은2인 1조로 편성된 각 조에 1마리씩 마취되어 전달되었다. 이제 막 15살 정도 된 어린 학생들에게 동물실험의 방법과 윤리는 듣도 보도 못했을 것이 뻔했다. 학생들은 천천히 생명에 대한 무지함과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인간의 잔인성을 증명해 갔고, 아이들의 손이 해부에 익숙해질 때쯤 나는 구석에서 숨죽여 울어야 했다.
인간의 무지는 때로는 잔인성을 만들어 낸다.
어린 학생들의 체험학습과 내가 했던 동물실험이 얼마나 크게 달랐을까. 이제 와서 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연구라는 명목 하에 치러지는 희생은 인간을 위한 포장일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목숨을 잃어야 하는 동물에게 무엇이라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면, 중학생의 손이든, 과학자나 대학원생의 손이든 희생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지의 영역을 앎의 영역으로 바꿔나가기 위해서,
누군가에게는 얻고자 하는 것을 차지하기 위해서,
지금도 멀쩡한 동물들이 매일 희생되고 있다.
다행히 동물의 생명을 존중하는 움직임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고 동물실험을 대체하는 기술이 지속적으로 개발되고 있다는 뉴스는 계속되고 있다. 이것이 언제 들어도 반갑기만 하고 고맙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가장 좋은 것은 살아있는 생명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줄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다는 것에 있다고 본다. 단지 그러한 혜택이 가난한 연구종사자들과 랩에게도 동등하게 주어지기를…
하루라도 희생되는 동물이 발생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Sprague Dawley Rat은 전신이 백색의 털로 덮여 있고, 빨갛고 큰 눈을 갖고 있다. 보통 크기는 일반적인 마우스보다 크다. 성체는 태어난 지 한 달 정도 된 강아지 크기와 비슷하다. 출산 횟수나 한배에 낳는 새끼의 수가 많으며, 특히 임신기간이 짧다. 이러한 이유로 실험동물로 주로 희생되고 있다.
동물 실험을 하고 시간이 많이 흘렀다. 이젠 실험은 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벌써 약속된 날짜가 왔다.
예약된 시간보다 조금 늦었다. 지각이다. 그래도 많이 늦지 않아 도착하고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가졌다.
선생님을 이제는 2주에 한 번씩 만나고 있다. 이전보다 많이 좋아졌고 천성이 천진난만한 게 도움 되는지, 아니면 회복에 필요한 생각을 하는 데 재능을 보이는지, 아니면 사랑을 받아서 인지, 잘하고 있다는 칭찬과 격려도 받는다.
누구에게나 위로와 격려를 해주시는 게 이분의 직업적 역할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큰 위안이 된다. 위로와 격려를 받는 사람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다. 받아봐야 줄 수 있다는 말을 실감하는요즘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늘 같은 질문으로 대화가 시작된다. 그리고 나는 지내온 날이 거의 좋았다, 컨디션이 괜찮았다로 대답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불편한 점에 대해서도 묻는다. 사실 며칠 전부터 꾸준하게 괴롭히는 악몽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왔다.
내과, 이비인후과에서 어디가 불편한 지 물어보면 으레 대답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어딘가 평가를 받는, 관찰의 대상이 되는 느낌이 이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지만 ‘더’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머리가 아파요, 목이 따끔거려요, 배가 아파요. “가 아닌 지난 오래 묵혀놓은 과거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오랜 시간 동물 실험을 했어요. 수많은 동물을 희생시켰는데 여전히 그게 힘들어요. 죄책감 같아요. 꿈에서 동물이 잔인한 사체로 보여요. 하루 기분에 영향을 줄 정도로 선명해서 힘들었어요. “
담담하게 이어지는 이야기지만 나는 여전히 그 경험들에 힘들어하고 있다. 선생님도 아직도 그 경험으로 힘들어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해소는 어떻게 하세요? “
”방법이 없어요. 해소할 방법이 없는 것 같아요. “
예전에도 글에 썼지만 나는 용서받을 대상을 잃어버린 느낌이다. 모두를 잃어버렸기에 누구에게 미안하다고 용서해 달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냥, 동물을 더 생각하고 아껴주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 같아요. 길고양이 만나면 더 예뻐하고 조금 더 잘해주고 싶고…“
”그게 도움이 되는가요? “
”지금으로서는 그게 가장 도움 되는 방법 같아요. “
선생님은 가만히, 만나고서 처음으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셨다. 하기야 이런 경험으로 힘들어하는 환자도 드물겠지 않은가.
”보통은 사이코 드라마라는 걸 치유 목적으로 해요. 나를 힘들게 하는 대상을 대역으로 대신해서 관계나 생각이 회복될 수 있게 하죠. 다정하고 친절하게 상황을 연출하던지, 긍정적인 기억이 생길 수 있게 도와주는데, 그게 어렵긴 하겠네요. 상대가 동물이니까..., 그래도 지금 스스로를 위한다는 느낌이 드는 방법을 찾았다면 그게 맞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위로가 되세요? “
”네. 일단 그래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동물을 더 아끼려고요. “
자신이 위로받는 느낌으로 나를 위한다는 마음이 있다면 거기에서부터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해주신다.
트라우마, 사전적으로 심리적 외상으로, 신체적⸳ 정신적 안녕에 위협이 되는 충격적인 경험을 말한다.
동물실험에 대한 나의 죄책감의 시작은 아주 어릴 적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쯤 되었을 때였을까. 동네 어른들이 공터에서 보신탕을 먹겠다며 개를 잡았다. 나는 그 모습을 목격했고 그 기억이 얼마 전 일처럼 또렷하게 남아있다. 동네가 떠나가게 울리는 소리가 아직도 기억난다. 그래서인지 어디선가 개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소스라치게 놀라거나 동물학대 현장은 아닌지 예민하게 반응한다.
내가 해온 동물실험에 대한 받아들임이오래된 기억과 얼마나 가까이 맞닿아 있을까. 배움의 갈증을 해갈하기 위한 욕심이 빠져버리고 남는 게 죄책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때 나는 내 전공을 바꾸지 않았을까.
생리학이라는 학문은 살아있는 이치를 연구하기에 피할 수 없이 살아있는 세포나 생명체를 관찰해야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삶의 이치를 연구해야 했던 내가 그 아이들과 함께 했다.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린 아이들과 남아 있는 나, 꿈에서라도 다시 그들을 만난다면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