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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앎 Jan 30. 2024

에세이의 위로

사람을 살리는 글


몸과 마음이 힘든 날에는 에세이를 주로 읽는다.

타인의 일기를 왜 그렇게 읽는지 떠올려보면, 내 일상도 남과 다르지 않게 평범하다는 것을 확인하거나 위로가 되어줄 친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음을 느끼곤 한다.


때로는 세상과 연결된 인간으로 살고 있다는 안심이 필요했다. 그럴 때도 어김없이 타인의 내밀한 이야기를 찾았다. 그렇게 누군가의 에세이는 공허하고 외로운 마음을 달래줄 상대로 가장 적합했다.


작가와 나의 생각이 어느 지점에서 맞닿거나 표현하기 어려웠던 감정이 글로 나열된 것을 보면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삶에 환멸을 느끼거나 자기혐오에 빠져 있을 때에도 비난하는 법이 없었다. 늘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위로와 이해가 돼주었다.  


책 한 권을 제대로 읽는다는 행위는 곧 독자가 저자와 친구가 된다는 의미임을 한나 아렌트의 삶과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독해하기 어려운 책은 다가서기 힘든 친구와 비슷하지만, 마침내 그 책을 제대로 읽어 냈을 때 독자는 저자의 내면을 이해하게 되고 저자가 쓴 한 권의 책을 매개로 저자와 우정을 맺게 된다.


장영은. 『글 쓰는 여자들의 특별한 친구』, 민음사, p210



박완서 작가는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에서 하나뿐인 아들을 사고로 잃어버린 후 삶의 의지를 잃어버렸던 시간을 담담한 문체로 써내셨다.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시기가 지나고 어느 날부터인가 목구멍으로 음식과 물이 넘어가는 스스로에게 혐오의 감정을 느끼는 글, 그리고 어느새인가 살기로 결심하는 글에서 어쩌면 나의 힒듬이 작게 느껴졌었는지도 모르겠다.


박완서 작가의 글을 통해 자기혐오는 인간이기에 자연스러운 것이며 성장의 과정임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누구나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작가환멸과 자기혐오의 시간을 쓴 글들, 삶에 대한 이해와 받아들임, 그리고 내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쓴 글은 나 또한 마찬가지로 생의 와중에서 비켜나 있지 않음을 깨우치게 했다.


모든 것은 시간으로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 계절의 변화와 하늘의 섭리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글도 어디에서도 만나볼 수 없는 위안이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절에는 주 2,3일 대면수업이 시작되었고 잦은 병치레를 피할 수 없었던 그때,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 될 때』를 읽었다. 저자가 암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중에도 의사로서 자신의 자리를 고집스럽게 지키는 글은 힘없고 무력해진 몸을 일으키게 했다.


몸에 번식한 바이러스와의 싸움의 무게는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인간의 모습에서 가볍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의 살려고자 했던 의지를 읽어나가며 나는 존재 자체가 살아야 할 이유로 충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신형철 평론가는 “텍스트에 대한 모든 해석은 자기 자신에 대한 해석이다.”라고 했다. 박완서, 폴 칼라니티 그 외 수많은 작가는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가장 힘들었던 시절, 나를 살게 하는 글을 썼다고도 할 수 있다. 그 덕에 지난 몇 해를 살았고 여기까지 흘러왔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제법 몇 가지 있다. 어쩌면 그중에 하나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내밀한 이야기를 쓰기 위함일지 모르겠다. 그 이야기를 통해 나처럼 누군가도 미약하게나마 공감, 이해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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