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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앎 Feb 05. 2024

두 번째 삶

유난히 까만 머리카락을 넘기면서 이전에 비해 눈에 띄게 늘어난 흰머리를 유심히 세어 보았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어쩌다가 가닥가닥 발견되더니 이제는 세어보기 힘들 만큼 많아졌다. 늘어나는 숫자만큼 익숙해진 것인지 새로 나기 시작한 부분의 흰머리를 신기하게 관찰하기도 한다.


전에는 끈질기게 찾아 없애기도 했지만 더 이상 그러지 않는다.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항복, 이 끝나지 않는 게임에서 나는 이길 방법이 없다. 노화가 어김없이 나를 통과하고 있다. 어쩔 수 없는 것들…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것들이 늘어나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체념하는 것, 아니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는 것은 이렇게 훈련되는 것일까. 이제는 백발의 모습을 기대하고 상상해 보기도 한다. 강경화 전 장관처럼 똑 떨어지는 백발의 단발머리도 해보고 싶다.     


사실, 작년까지만 해도 노년의 나를 상상하지 않았다. 그것이 오만하고 이기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고 공공연하게 생각했다.


이미 나는 후회가 없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고 언제든 떠나도 미련이 없다 생각했다. 어쩌면 책임질 게 없는 심플한 삶이라서, 아니면 나의 우울이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기에 노인이 된 나를 상상하는 것은 삶의 의지다. 인생의 빛과 어둠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다는 다짐이다.   




백발이 되려면 꽤 오래 살아야 할 것 같다. 앞으로 20년, 30년…


그러기 위해서는 긴 시간을 견뎌내야 할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사소한 일상에서 타인과 주변 상황에 상관없이 혼자서도 잘 웃을 수 있는 삶이어야 한다. 좋아하는 음악만 들어도, 하늘의 구름과 별만 봐도 행복하다고 느끼는 나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  


바리스타…

오래전부터 카페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실행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새로운 직업과 일터는 육체를 움직이게 만들었고 정신노동을 주로 했던 삶에 고된 육체노동이 시작됐다.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운동할 때와는 다른 낯선 땀 냄새가 났다. 파김치처럼 절여진 육체가 놀라 울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와중에 다시는 느끼지 못할 줄 알았던 잊고 있었던 감정이 느껴졌다. 땀이 마르고 난 자리에 살아 있는 느낌, 말로 표현하기 힘든 삶의 기쁨과 즐거움, 뿌듯함이 채우고 있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카페에서 만난 많은 사람 중에는 여전히 세상은 변해야 하는 것이 많고, 하루를 짐처럼 느끼게 하는 이들이 있었다.


주 15시간 이상을 훨씬 넘게 근무하지만 초보니까 주휴수당을 지급하지 않겠다던 당당한 사장님, 무례한 말과 험한 분위기로 사내 기강을 잡으려는 사장님, 바리스타 경력 8년이라는 시간과 함께 자아도취에 빠져 있던 혈기 왕성한, 카페에서 사장놀이를 일삼던, 그래도 배울 점이 많았던 귀여운 어린 동료, 그들은 이제 나에게 아무런 상처를 주지 못한다.


그런 것쯤은 내 삶에서 그저 힘없이 스쳐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내일도, 모레도 흰머리는 더 늘어날 것이고 보기 흉한 것이 아니라면 나는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이다. 지금보다 더 많은 진통제를 먹어야 하는 날들이 계속될 것이고 비 오기 전에는 여기저기 아픈 날들도 계속될 것이다.


삶을 이어간다는 것이 때때로 두렵다. 무엇을 더 상실하고, 얼마나 더 공허해야 하고, 어떤 슬픔이 닥쳐올지 여전히 불안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백발의 단발머리를 하고 좋아하는 과목을 강의하고 좋아하는 음악을 선곡하고, 책과 커피, 위스키나 와인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있는 나를 앞으로 계속 상상해 보려고 한다.      


마흔둘, 두 번째 삶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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