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고 있는 특별한 능력을 꼽으라면, 누군가의 내면 이야기가 나올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평소 자각하지 못하거나 입 밖으로 꺼낸 적 없는 본인의 생각을 꺼내게 하는 일.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 있다.
첫 번째, 경청한다. 상대의 눈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듣는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무엇으로 생각이 복잡한지 듣는 것에 집중한다. 주위에 눈이 가거나 소음이 걸릴 때도 있다. 하지만 금세 이야기와 상대에게 집중한다.
두 번째, 궁금해한다. 이것은 이야기나 어떤 사건이 아닌 말하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다. 나와 함께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더 알고 싶은 마음이다. 그(녀)를 향한 호기심이다.
세 번째, 질문한다. 대화 중간마다 질문을 던진다. 듣다 보면 디테일한 부분에 대해 궁금증이 생긴다. 이것 역시 상대의 깊은 내면에 대한 궁금증이 있기에 가능하다. 말하는 대상은 자신의 생각에 더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몸에 베인 섬세한 대화 습관이다. 애정 하는 타인에게 갖는 궁금증과 호기심이 나를 듣는 자로 만든다.
그런데 이 대화방식에 부작용이 있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장기적으로 기억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상대방에 대해 기억해야 하는 부분만 선택적으로 골라 기억하게 된다. 어쩔 수 없다. 너무 많은 양의 정보가 흘러나왔기 때문에 머리가 뛰어나게 좋은 편이 아닌 나로서는 이게 최선이다.
또, 이런 듣는 태도는 때로는 결핍과 외로움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나의 삶에 부재하는 듣는 자에 대한 결핍, 말하지 못하는 외로움.
20년을 넘게 알고 지냈던 친구와 거리를 두고 지낸 지 1년이 넘었다. 나의 이야기는 듣는 법을 모르는 녀석에게서 금세 휘발되곤 했다. 공감이 빠진 관계에 비어있는 듯한 허탈감이 찾아왔다.
어쩌면 쓰는 것이 이렇게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모두의 말을 듣는 사람이 되었으나 정작 나의 이야기는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으므로...
그래서 듣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동경한다. 좋아한다. 아낀다. 그것이 얼마나 참을성 있는 태도인지, 섬세한 성정인지, 애정이 넘치는 행위인지 충분히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