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은 지나갔고 환희는 끝내 도착하지 않았다. 붙잡을 것도, 밀어낼 것도 없이 사태는 스스로 마침표를 찍었다. 남은 것은 사건이 아니라 감각이다. 새털처럼 가벼운 내 존재의 무게가 오히려 온몸을 지탱하고 있다는 기묘한 자각. 무엇을 잃었다기보다 하나의 층이 벗겨진 뒤 더 이상 가릴 것이 없어졌다는 느낌에 가깝다.
껍질은 이미 떨어져 나갔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 나다. 결핍은 결여가 아니라 비워짐에 가깝고 침묵은 상실이 아니라 정지에 가깝다.
그래서 쓸쓸하지 않다. 오히려 감정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이 맑은 평형 상태가 낯설 만큼 또렷하다. 나는 이 상태를 허무라 부르지 않는다. 비어 있으되 무너지지 않은 자리, 아무것도 채우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스스로를 지탱하는 이 감각을 나는 공허(空虛)라 부른다.
과천. Rollei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