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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의 글 Feb 23. 2022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엄마의 이름을 찾습니다. 

 ‘안녕하세요, 전 서울에 살며 남매를 키우고 있어요...’

아이를 낳은 후 나를 소개하는 자리가 생기면 머릿속이 바빠진다. 아무리 고민해봐도 나를 설명 할 단어가 없다. 내 정체성과도 같던 직장은 이미 그만둔 지 오래다. 이제 나는 동네 마트에만 가도 ‘저기요, 아기 엄마!’ 하면 서둘러 뒤 돌아보게 되는 30대 주부이다.

첫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 위주의 관계들을 꾸리게 되었다. 내가 불러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내 이름은 자연스럽게 OO 엄마로 아이의 이름과 함께 불리게 되었고 나조차 그 이름에 점점 익숙해졌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갓 입학했을 때 있었던 일이다. 아이들이 선생님들과 알아가는 동안 보호자들은 멀찌감치 앉아 적응을 도왔다. 어색한 기운을 깨고 보호자들끼리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아기가 몇 월생인지, 어린이집을 다녀 본 경험이 있는지, 맞벌이 가정인지 등 아이에 대한 정보를 나눴다. 서로에 대한 호칭 또한 자연스럽게 OO엄마,OO언니 등 아이 이름을 붙여 부르게 되었다.

아이들은 차차 어린이집에 익숙해졌고 이제 보호자들은 교실이 아닌 바깥에서 대기하기 시작하였다. 그사이 친해진 한 언니와 어린이집 마당을 나서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낯선 얼굴의 아이 엄마가 걸어오고 있었다. 늦은 입학을 하게 된 아이 친구의 엄마였다.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다솜반 OO 엄마에요!’ 함께 있던 언니도 아이의 이름을 대며 자연스럽게 인사를 했다. 새 친구 엄마의 인사말을 듣고 나는 심장이 쿵 떨어졌다.

‘반가워요! 전 김OO이에요. 아이 이름은 김OO이고요. 아이 이름 말고 엄마 이름도 알려주세요!’ 아이의 이름이 아닌 본인의 이름으로 소개를 건네는 모습이 낯선 듯 좋았다. 아이의 이름을 빌리지 않고도 서로의 이름을 불러줄 수 있었는데 왜 잊고 살았지?


 평소 나는 성곽길을 따라 작은 숲까지 걷는 산책을 즐긴다. 하루하루 조금씩 변하는 나무나 풀들을 바라보는 것이 산책이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이지만 아무도 없는 산책길에서 나 혼자 누릴 수 있는 호사는 따로 있다. 그건 바로 소리가 주는 즐거움이다. 더운 여름엔 더위를 피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다 언뜻언뜻 불어오는 바람에 다시 발걸음을 늦춘다. 무성한 나무 사이사이 바람이 통과하는 소리를 듣는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다 보면 바람 사이 한껏 목청을 올려 자신을 드러내는 새소리가 또렷하게 들린다. 시간이 지나 겨울이 된 후 산책길에서 만나는 앙상한 나뭇가지 위 새들은 왠지 모르게 쓸쓸한 느낌을 주었다. 겨울날의 바깥 생활은 괜찮은 건지 마른 나무 꼭대기 군데군데 지어진 동그란 새 집을 보며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런 나에게 새들은 걱정 말라는 듯 이 나무 저 나무 옮겨가며 신호를 보낸다.


 얼마 전, 신도시에서 며칠 머무를 일이 있었다. 신도시답게 큰길 사이사이 공원을 조성해 둔 곳이 많았다. 아이들이 놀이터에 가고 싶다고 하여 큰길 옆의 놀이터에 갔다. 아이들이 노는 동안 벤치에 앉아 아이들을 바라보는데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새소리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신도시에서의 새소리가 내 귀에는 생소하게 들렸다. 빌딩과 아파트에 둘러 쌓여 살아가는 새의 삶은 우리 동네의 새들과 다르게 애처롭게 느껴졌다. 그러나 새들은 별로 개의치 않아 하는 눈치였다. 보란 듯이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치의 소리를 힘껏 내며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새가 우는 소리를 들으면 어떤 새인지 알 수 있다. ‘까아악’ ‘뻐꾹 뻐꾹’ 등 익숙한 새 소리를 들으면 새의 이름도 단번에 떠올릴 수 있다. 숲 속에 사는 새인지, 도심 한 가운데 사는 새인지, 혹은 전혀 새가 살 수 없을 것 같은 곳에 사는 새인지는 상관이 없다. 새는 어디에서나 자신만의 소리로 자신만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고 있다.


 ‘전업주부’라는 정체성의 무게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묵직하게 나를 눌렀다. ‘나’라는 사람은 희미해지고 아이들과 남편에게 기댄 삶을 살았다. 그런 나를 다시 ‘나’로 살게 해준 건 책과 글이다. 처음 독서 모임을 가기 시작했을 땐 작은 일에도 마음이 크게 동요했다. 오전 모임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평소보다 아이들을 일찍 깨워 보내는 것조차 괜히 미안했다. 허둥지둥 아이들을 보내고 서둘러 모임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눈물을 쏟던 날도 있었다.


내가 뭘 하겠다고, 집에나 있어야지.


 하지만 이번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간절했다. 나를 위한 시간과 가족을 위한 시간을 함께 꾸려가고 싶었다. 주부라는 정체성 안에서는 아이와 가정을 살피는 일이 가장 중요한 건 맞다. 하지만 그 일을 해내는 나부터 살펴야 모두에게 단단한 울타리를 내어줄 수 있다. 내 이름이 불리는 자리를 되찾고 싶었다. 나에겐 책과 독서 모임이 그런 곳이었다. 느린 속도였지만 따로 또 같이 꾸준히 읽었고 생각을 나눴다.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며 2년의 시간을 보냈다. 최근에는 어설픈 글이지만 글을 쓰며 나를 천천히 깊숙하게 돌아본다. 그리고 나를 기록한다.


 내가 전업주부인지 워킹맘인지 혹은 돈을 벌고 있는지 아닌지, 누가 읽어도 좋은 글은 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바깥에서 오는 누군가의 편견은 쫓지 않으려 한다. 나부터 나를 인정해주고 싶다. 나답게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다독이며 나만의 언어와 글을 새기며 살고 싶다. 어느 자리에 있어도 나만의 정체성을 진하게 풍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산책은 나에게 ‘걷는 사람’ 이라는 이름을, 독서 모임은 나에게 ‘읽는 사람’ 이라는 이름을, 글방은 나에게 ‘쓰는 사람’ 이라는 이름을 안겨주었다. 이제 나는 아이들에게 기대지 않아도 스스로를 소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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