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봄은 겨울의 흔적을 지우며 시작한다. 봄을 찾아 헤매는 사냥꾼이라도 된 것 마냥 주변을 샅샅이 살펴본다.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과 다른 내일을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 더 오래, 더 천천히 걷는다. 걷는 내내 내 눈은 사방을 둘러보기 바쁘다. 자연의 시간은 어느 하루도 헛되게 흘러가지 않았다. 나는 온몸의 감각을 열고 촉수를 곤두세우기 시작한다. 어느 날 둘러보면 새싹이 돋아나고, 어느 날엔 꽃이 활짝 펴 있고, 누군가에겐 갑자기 찾아온 봄처럼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겨울부터 지켜본 사람은 알고 있다. 이 모든 일은 하루아침에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어느 겨울, 목련 나무를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이 겨울에 웬 꽃 봉오리? 예전보다 오른 겨울 기온 때문에 계절을 잊고 서둘러 꽃눈을 틔운 목련의 실수라고 생각했다. 길을 걷다 목련을 마주칠 때마다 걱정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와 산책을 하다 목련 나무를 다시 만났다. ‘어머머, 애들아, 이것 봐! 겨울인데 목련이 잘 못 알고 꽃을 피우려 하는 것 같아, 어쩌지?’ 내 호들갑이 무색하게 아이의 대답은 간단했다.
“엄마, 이건 겨울눈이야. 꽃 봉오리가 아니야.”
겨울눈? 사계절 내내 비슷한 장소를 산책하며 눈앞의 풍경을 유심히 바라보며 나름대로 나무들과 알아가고 있다 생각하며 살았는데 겨울눈의 존재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목련 나무는 꽃이 진 후 여름부터 가을을 지내고, 겨울의 추위를 견뎌내야 다음 해에 또 꽃을 피울 수 있다고 한다. 다시 내년을 살아갈 준비를 하기 위해 겨울눈을 만든다. 마치 보송보송한 붓처럼 생겼지만 생김새와 다르게 아주 단단한 기운을 뽐낸다. 보온, 보호의 기능을 다한 겨울눈은 떨어졌다 다시 만들어지는 과정을 한 두 번 반복하기도 한다. 봄이 올 때까지 겨우내 그 몸을 잔뜩 움츠리고 꽃눈을 감싼다.
봄이 왔다고 목련이 바로 자태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따뜻한 날이 오면 조심스레 겉옷을 벗어보는 사람처럼 목련은 겨울눈을 먼저 벗는다. 겨울눈이 입을 벌리듯 반으로 갈라져 떨어지면 진정한 꽃눈을 볼 수 있다. 그 후 목련 나무는 우리 눈에 익숙한 아기 손바닥 만한 꽃잎을 모습을 점점 드러내기 시작한다.
<두 늙은 여자>라는 책 속 문장에 빗대면 나는 그동안 36개의 봄을 보았고 이제 37번째 봄 속으로 걸어가는 중이다. 자연 속 수많은 봄 중 하나는 오랜 시간 조용히 기다리다 꽃을 피우는 목련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 삶 속의 봄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을까.
사실 지난겨울에도 나는 봄을 만났다. 자발적으로 글방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자, 당신은 글을 써도 되는 사람입니다. 오늘부터 시작하세요! 자꾸 누군가의 허락을 구하고 싶었던 일, 출발 신호를 누군가 보내주길 기다렸던 일, 그래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일. 그런 일이 나에겐 글쓰기였지만 일단 내 안의 신호를 믿고 시작했던 글방이다. 3번째 글방 모임을 마치고 선생님과 대화를 나눈 날이었다. 집으로 돌아간 나는 어딘가에 홀린 듯 신랑에겐 생일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노트북을 받아냈고, 노트북 주문 후 나는 바로 브런치 작가 지원을 하였다. 이른바 나에겐 ‘화요일의 마법’으로 기억되는 날의 이야기이다.
복불복, 혹은 뽑기 수준이라는 등 작가 선정 기준이 예전 같지 않다고들 했지만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나에겐 그만큼 동기부여가 되는 일이었다. 그동안 소중히 품어 온 씨앗 하나를 고르고 골라 건넸고 하루 내내 기다렸다. 고맙게도 내 씨앗은 공식적인 터를 얻을 수 있었다. ‘축하합니다!’라는 문구를 본 순간 한 겨울 속 내 마음은 찬란한 봄을 만났다.
아쉽게도 그 마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런 글 저런 글 계획하며 무엇이든 써보자 하다가도 막상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고 나면 내 안의 단어 하나 꺼내기가 어려워졌다.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많은 시대라는데 나까지 써도 되나. 쓰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그냥 써질 리가 없는 그런 글을 두고 성급한 마음으로 끝없는 자기 검열을 하던 나는 다시 잔뜩 몸을 움츠렸다.
이 글을 쓰는 내내 생각해보니 나는 기다림의 시간도 없이 그냥 찾아 올 봄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래서 여전히 성급하다. 순서를 어긴 적 없는 자연의 변화, 계절의 흐름을 눈으로 보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살아간다. 꽁꽁 언 땅 밑의 씨앗은 봄을 의심하지 않는다. 겨울눈 속 꽃눈 또한 그랬을 것이다. 자연 안에서 우연히 일어난 일은 없다. 재촉한다고 달라지는 일도 없다. 그저 늘 그랬듯 천천히 속도에 맞춰 다음 계절을 향해 나갈 뿐이다.
북미 원주민들은 달력을 만들 때 그들 주변의 풍경의 변화나 마음의 움직임을 주제로 그 달의 이름을 정했다고 한다. 인디언 부족 중 하나인 아라파호족이 부른 3월의 이름은 ‘한결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달’이라고 한다. 그 이름을 빌려 37번째 나의 봄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다를 글씨앗을 품는 계절이라고 다시 정의한다.
아이들이 듣는 동요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은 ‘모두 다 꽃이야’라는 노래다. 산에 피어도, 들에 피어도, 이름이 있어도 없어도, 봄에 피어도 여름에 피어도 모두 다 꽃이라는 노랫말에 위안을 얻는다. 언제 피어도 소중한 내 글씨앗을 귀하게 여겨야지. 지금이 봄이더라도, 혹은 봄이 아니더라도 실망하거나 포기할 필요는 없다. 씨앗을 품고 사는 한 언제라도 봄이 아니던가, 더 이상 땅 속의 일을 의심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