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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의 글 Apr 19. 2022

봄이다, 봄!

땅을 깨워 얻은 선물, 나물의 계절.

 오랜 겨울을 잘 버텨낸 우리에게 ‘봄’이라는 계절은 커다란 선물꾸러미처럼 다가온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 걸 보니 이건 사랑스러운 선물임이 분명하다. 산책을 하다 아기 손톱만 한 새순을 발견하면 한참 동안 그 자리를 떠날 수 없다. 여린 생명의 강한 기운을 느낄 수 있음에 감탄하며 두 눈과 두 손에 오랫동안 담는다. 봄의 기운은 ‘눈’과 ‘손’만이 누리는 기쁨이 아니다. 그것들은 입안에서 더 강하게 퍼진다. 특히 하우스 등의 인공적인 환경이 아닌 비옥한 땅 위에서 거칠게 자란 식재료들을 맞이할 때의 경이로움은 어떤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다. 환절기의 피로감으로 저 멀리 사라진 입맛이 나를 재촉한다. 봄이다. 친정집으로 가자! 

 

 몇 해 전, 친정 부모님께서는 경기도 가평에 위치한 산 깊은 마을에 텃밭 가꾸기를 목적으로 친구분과 함께 땅을 사셨다. 처음엔 텃밭이었지만 이젠 제법 집의 형태를 갖추었다. 부모님께서 시골집을 마련하신 후 가장 큰 혜택을 본 건 우리 가족이다. 한 겨울을 제외하고 봄~가을엔 수시로 시골집에 놀러 가 마음껏 뛰어 논다. 나에겐 언제든 제철 식재료를 얻어올 수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 되었다. 

  

 겨울 내내 조용했던 마을이 시끌벅적 해 지는 건 바로 이맘때이다. 아빠는 꽁꽁 얼어 있던 밭을 톡톡 건드려 깨우기 시작한다. 한 해 동안 우리에게 수확의 기쁨을 안겨줄 모종을 하나하나 헤아려 보는 건 아빠의 가장 중요한 업무이다. 마늘, 가지, 오이, 토마토, 감자, 상추, 호박 등등…. 이름과 수량을 하나하나 적어 내려간다. 이런 날 모종을 사 오는 건 내 몫이 된다. 시골집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위치한 읍내의 화원으로 향한다. 읍내 분위기도 겨울과는 완전히 다르다. 화원 주인들은 각종 모종과 비료들을 내어 놓기 바쁘다. 목청 높여 화원 사장님을 부르고 내 차례를 기다리기까지 복잡한 사람 사이를 파고들어야 하는 험난한 과정들이 있지만 그 기다림조차 즐겁다.

 

 밭을 갈고 적당한 간격을 두고 모종을 심어 넣는 것이 아빠들(마을에서 사귄 아빠의 친구분들이 꽤 많다.)의 일이라면 엄마들은 다른 일로 분주해진다. 봄엔 엄마의 얼굴을 마주하기가 쉽지 않다. 엄마는 늘 땅 가까이 쭈그려 앉은 뒷모습만 보여준다. 바로 ‘봄나물’ 때문이다. 


 동이 트자마자 눈을 뜬 엄마는 작당모의라도 하듯 소곤소곤 통화를 하고 호미와 작은 과도, 나물을 담을 봉투, 그리고 챙이 넓고 목까지 가려지는 커다란 모자를 챙겨 조용히 밖으로 나간다. 그렇게 나간 엄마들은 몇 년 동안의 경험으로 알아낸 봄나물 핫 플레이스를 향해 걸어간다. 엄마들은 새벽을 지나 아침이 훌쩍 넘어도 돌아오지 않는다. 해가 중천에 뜰 시간이 되어서야 흙냄새를 잔뜩 풍기며 양손 가득 나물을 들고 돌아온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땅의 산물은 바로 ‘냉이’이다. 봄! 하면 냉이! 하고 바로 외칠 정도로 냉이는 봄을 대표하는 나물 중 하나이다. 냉이는 빠르면 늦겨울, 보통 초봄부터 먹을 수 있다. 냉이 특유의 깊은 향은 추운 겨울을 겪어낼수록 진해진다고 한다. 최근에는 시설 재배를 통해 사시사철 밥상에서 냉이를 찾아볼 수 있지만 그래도 이른 봄 야생의 땅에서 얻은 냉이의 향을 따라올 수는 없다. 냉이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쉬운 요리는 ‘냉이 된장국’이다. 향긋한 냉이 한 뭉치면 다른 재료가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냉이에겐 함정이 있었다. 그건 바로 손질법이다. 냉이 손질 작업은 나에게 인내심을 요구하였다. 냉이는 뿌리와 잎을 모두 사용하는 나물이기 때문에 섬세한 손질이 필수다. 보통 30분 이상 흙을 긁어내고 물에 헹구는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냉이를 손질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바로 엄마를 찾는 것이다. ‘엄마, 요즘 냉이 나왔어?’ 이 한마디면 며칠 안에 손질까지 된 싱싱한 냉이를 얻을 수 있다. 뿌리 한 줄기도 놓치지 않고 된장국 한 그릇을 싹 비우는 건 엄마의 수고를 향한 나만의 감사 표시다.

 

 냉이 다음으로 엄마의 주머니를 꽉 채워주는 나물은 바로 ‘쑥’이다. 쑥을 캐는 날엔 여지없이 나와 내 딸도 함께 들판으로 불려 나간다. 쑥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4월의 들판엔 쑥이 말 그대로 지천으로 널려 있다. 단군 신화에까지 나오는 쑥은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효능이 있어 여성들에게 특히 좋은 식재료라고 한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며 땅을 따라 몸을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일행들과 멀리 떨어져 쑥 캐기에 몰입한 나를 발견할 수 있다. 가득 딴 쑥을 두 손에 담아 코를 박고 한껏 숨을 들이마신다. 다시 고개를 숙이고 쉴 틈 없이 봉투에 쑥을 채운다. 우리 집에서 쑥은 1년 내내 유용한 간식 재료가 된다. 일단 갓 딴 쑥은 깨끗하게 씻어 바로 ‘쑥 버무리’로 만든다. 엄마의 냉장고는 화수분처럼 부재료들이 척척 나타난다. 냉장고에서 꺼낸 하얗고 고운 쌀가루와 쑥을 골고루 섞은 후 약간의 소금과, 설탕, 그리고 물을 넣는다. 찜통에 면포를 깔고 그 위에 버무린 쑥을 넣고 고슬고슬하게 익을 때까지 찐다. 찜통에서 꺼낸 뜨끈한 쑥 버무리를 호호 불며 입에 넣는다. 입 안 가득 쑥이 내어준 봄 향기가 넘실거린다. 시골집에서만 마시는 달달한 믹스커피와 쑥 버무리를 함께 나눠 먹은 뒤 엄마는 또다시 분주해진다. 남은 쑥은 방앗간으로 향할 준비를 한다. 큰 솥단지에 쑥을 삶고 쑥을 삶는 동안 다른 쪽에선 흰 쌀을 불린다. 삶은 쑥과 불린 쌀을 방앗간으로 가져가 잘 섞은 후 갈면 바로 쑥 쌀가루가 된다. 이 쑥 쌀가루에 간을 하고 익반죽(뜨거운 물로 익혀가며 반죽을 함)을 만든다. 반죽을 적당한 크기로 떼어 동그랗고 납작한 모양을 만든 후 찜통에 찌면 쫄깃하고 향긋한 쑥개떡 완성! 참기름을 바른 후 설탕에 찍어 하나씩 먹다 보면 어느새 한 접시가 사라지는 쑥개떡은 내가 좋아하는 떡 중 하나이다. 쑥 쌀가루는 오랜 시간 보관이 가능하다. 주기적으로 쑥떡을 만들어 주는 엄마 덕에 일 년 중 어느 때고 쑥의 맛을 볼 수는 있지만 봄에 먹는 쑥떡만큼 향기롭지는 않다.  


 올봄엔 아직 시골집에 가지 못했다. 초봄 추위가 제법 오래가기도 했고, 친정 부모님과 함께 사는 동생 가족의 확진에 이은 친정 엄마의 확진, 그리고 이젠 우리 가족의 코로나 확진으로 여전히 나는 방 안에 앉아 바깥의 봄을 상상만 하고 있다. 며칠 사이 꽤 오랜 시간 동안 창문을 열어도 춥지 않을 정도로 기온이 오른 것 같다. 바깥 산책은 못 하지만 창문 밖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집 앞의 봄을 눈으로 좇는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연두빛이 고맙다. 이런 와중에도 코 끝에 닿은 봄의 향기가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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