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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의 글 Apr 28. 2022

아이의 말

엄마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아이의 한마디

 지난 겨울부터 참여하고 있는 글방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계절 글방’이다. 계절의 흐름에 맞춰 호흡하고 관찰하며 글을 길어 올린다. 지난 3월 시작한 봄 글방의 4번째 과제는 봄 관찰 일기였다. 한 그루의 꽃나무를 매일, 혹은 며칠의 기간을 두고 관찰하며 그림을 그리고 일기를 써야 했다. 비슷한 길의 산책을 자주 하는 편이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집 앞 화단에서 관찰 대상을 골랐다.

 

 처음 고른 건 조팝나무였다. 우리 집 화단에서 제일 먼저 봄을 알리는 식물이기도 했고 주차장을 오가며 하루에 6번 이상은 늘 마주하는 나무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처음엔 한 자리에서 이 각도 저 각도 오가며 잎을 잘 찍으려고 애썼다. 마음처럼 사진이 잘 나오지 않자 다른 ‘사진이 잘 나오는’ 나무를 찾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려야 하므로 없는 솜씨로도 그릴 수 있는 간단한 식물이어야 했다. 매일 다른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에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식물을 찾고 싶기도 했다. 어느새 나는 과제의 의도와 점점 멀어진 채 쑥쑥 자라는 모습이 눈에 보이고, 그리기 쉬운 식물을 찾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정작 중요한 일에는 집중하지 못했다. 

 

 하루하루 마감 기한이 다가오니 마음만 급해졌다. 그러다 문득 작년 이맘때의 일이 생각났다.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강낭콩을 심은 작은 화분을 가져온 적이 있었다. 우리는 ‘낭낭콩’ 이라 이름을 지어주고 매일 화분을 들여다보았다. 땅 속에서 콩을 뚫고 떡잎이 올라오고, 그 떡잎이 떨어진 후 새순이 돋아 위로 자라는 모습을 아이와 함께 지켜보았다. 큰 아이와는 매일 줄기의 길이를 기록하며 콩잎을 따라 그렸고, 작은 아이와는 잭과 콩나무 이야기를 상상하며 식물을 돌보는 즐거움을 함께 나눴다. 우린 순간에 충실히 머물러있었다.

 

 지난 주말, 온 가족이 함께 평소 걷던 길보다 좀 더 긴 코스의 산책길에 나섰다. 하루가 다른 봄의 풍경, 자연의 모든 색에 대한 경이로움과 새로운 길을 만난 설렘을 만끽하던 나는 눈앞의 모든 것을 담을 기세로 주머니에 둔 핸드폰을 수시로 꺼내 사진을 찍었다. 내내 손을 잡고 걷다가 자주 손을 놓으니 아이가 말했다.

“엄마, 나는 핸드폰이 필요 없어. 눈으로 다 찍었어. 보고 싶을 땐 언제든지 볼 수 있는 사진이야.”

 

 아이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은 어땠을까? 입으론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면서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사진만 찍었던 나, 좋은 풍경이 보이면 남는 건 사진뿐이라며 잘 걷고 있는 아이들을 멈춰 세우기 바빴던 나.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의 몰입을 방해한 건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생긴 사진에 대한 집착이었다. 글을 쓰다 말고 핸드폰을 열어본다. 지난 1년간 쌓인 핸드폰 사진첩 속 사진 장수는 총 5592장이다. 사진첩을 손가락으로 쓱쓱 내렸다. 비슷비슷한 장면이 몇 장씩 연달아 나오기도 했고 이제는 필요가 없어진 사진도 수두룩했다. 선택 버튼을 누르고 하나하나 삭제를 하다 이조차 귀찮아져 다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 찍었다고 생각한 사진들이 오히려 짐이 되었고 찾고 싶은 몇 장면들을 떠올리려면 한참 동안 스크롤을 내려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두 손안에 모래를 가득 담으면 그 모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손 틈 사이로 빠져나가 손바닥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작은 마음 안에 너무 많은 것을 담다가 오히려 가진 것도 놓치게 되는 경우도 이미 경험해 보았다. 최근 나는 뭘 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느낌이 들어 며칠 내내 긴 생각과 무기력함에 빠졌었다. 내 무력감은 그동안 가꿔온 일상에 대한 익숙함과 편안함으로 오히려 순간의 소중함을 놓치면서 쌓여 온 감정이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제대로 된 선택과 집중을 하지 못한 탓은 아닐까? 아이들과의 산책길에선 카메라 속 풍경 사진이 아니라 눈 안에는 아이의 얼굴을, 마음속엔 아이의 말을 담았어야 했다. 사진첩에는 다시 찾아볼 의미 있는 사진만을 선택해 남겨 두어야 했다. 관찰일기를 쓰는 이유를 놓치지 말았어야 했다. 아이의 말에서 시작된 일상 점검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선택과 집중이라는 걸 다시 확인하게 해 주었다. 

 

 마음속에 말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잠시도 입을 쉴 수 없다는 6살 아이의 입에서는 종일 말이 쏟아져나온다. 아이의 작은 입을 보면 그동안 잊고 살았던 많은 감정들이 다시 솟아오르곤 한다. 꾸밈없는 아이의 말이 내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올해도 아이의 어린이집에선 식목일을 기념하는 강낭콩을 보내주셨다. 현재에 충실한 관찰일기는 이제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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