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끝에서 봄을 정의한다면,
‘처음엔 사방이 갈색, 어딜 봐도 갈색이야.'
입춘은 지났다고 하나 손 끝을 스치는 바람은 여전히 차갑고 매서웠다. 그럼에도 봄이 시작되는 첫 번째 절기인 ‘입춘’은 그 이름 하나로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 충분했다. 매일 걷던 길이 하루 사이에 달라질 리는 없겠지만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무심코 걷던 산책길에서는 조심스레 발걸음을 내딛으며 땅을 살피기도 했다. 그러나 그대로였다. 여전히 갈색인 봄이었다.
‘앗, 초록색인가?’하고 들여다봤다가, ‘에이, 아직 갈색이네’하고 마는 그런 갈색.’
여전히 갈색인 자연을 바라보며 봄은 대체 언제 오냐며 볼멘소리를 한 적도 있었다. 꽃눈인 줄 알고 보았다가 겨울눈인 걸 알고 뒤돌아 아쉬워하기도 했었다. (목련아 미안!)
‘그래도 갈색은 여전히 갈색이지만, 땅에 귀를 바짝 대고 두 눈을 꼭 감으면 땅속 깊숙이서 녹색 기운이 꿈틀대는 소리가 들려.’
봄의 입구에 선 나의 산책은 봄의 흔적을 찾아 걷는 일의 연속이었다. 봄의 마른 나뭇가지에선 겨울과 다른 물기를 느낄 수 있었고, 봄의 땅에서는 겨울 땅과는 다른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다. 봄의 차가운 공기에선 겨울 공기와는 다른 온기가 언뜻언뜻 느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런 변화가 없는 건 아니었다.
줄리 폴리아노의 <봄이다!>라는 그림책은 계절 그림책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을 바꿔준 책이다. 제목에서 예상되는 내용과 다르게 이 그림책은 처음부터 봄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봄’이라는 제목에 맞게 초록이 펼쳐진 책을 상상한다면 첫 장을 열자마자 다시 제목을 확인해 볼 수도 있을 정도이다. 이 책은 계절이 갈색의 시간을 지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방이 갈색인 시간이 지나가야 만날 수 있는 봄, 땅 아래로 귀를 기울여야 느낄 수 있는 봄의 기운..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봄은 그제야 조금씩 초록의 모습을 드러낸다.
보오오오오오오옴이길 바랬는데 짧은 이름처럼 봄은 정체를 드러낸 순간 순식간에 우리 곁을 지나간다. 봄의 모든 순간을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부지런히 촉각을 곤두세운다. 아침마다 기온을 확인하며 아이들에게 어떤 옷을 입힐지 고민하던 나는 어느새 얇은 바람막이만 작게 접어 가방에 넣어 주고 있다. 아이들을 모두 보내고 별다른 일정이 없는 날엔 산책길에 나선다. 좋아하는 길은 매일 걸어도 지루할 틈이 없다. 봄의 등장과 함께 새로이 알게 된 것들이 많다. 올봄 나는 겨울 내내 보았던 산책길의 화살나무 새순이 동네 할머니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워주는 모습을 보았다. 그동안 비슷하게 보이던 꽃나무들이 봄과 함께 피어낸 꽃을 보고 각각의 이름도 익히게 되었다. 작은방 외벽을 타고 내려오는 담쟁이 식물이 어느새 창문 위를 가릴 정도로 자랐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새 잎이 돋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하루가 다르게 울창해진 나무 사이를 거니는 기쁨 또한 봄이 온 후에 느끼게 되었다.
봄이라는 계절 안에서 내 삶의 봄을 상상해본다. 푸르름으로 가득한 생동감 넘치는 내 삶을 상상한다. 그동안 여기저기 흩뿌린 씨앗이 땅 위로 솟아올라 새싹이 되고, 꽃이 되고, 나무가 되는 모습을 상상한다. 꽃과 나무 사이를 가로질러 성큼성큼 걸어가는 나를 상상한다. 그러다 다시 봄의 한가운데 있는 현실 속의 나를 바라본다. 더 이상 오른쪽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검은 화면 속 깜박이는 커서만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모습이 보인다. 지금 나는 글을 쓰고 있다.
손가락에 모터라도 단 듯 쉴 새 없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TV 속 작가의 모습은 허상이 분명하다. 차마 스스로에게 ‘쓰는 사람’이라는 이름표를 붙이긴 부끄럽지만 이렇게 종종 글을 쓰는 내 눈앞엔 묵직한 모래주머니라도 찬 것 마냥 발목 잡힌 커서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한참을 째려보며 기싸움을 해 봐도 도통 걸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 커서를 바라보다 키보드에 손가락을 올리고 아무렇게나 놀려본다. ‘ㅁ;니ㅏㅇ러댜ㅗㅎ밍ㄻㅁ아럼 호열ㄷㄱㅂㄷ;’ 대충 쓰인 문자에 밀려 저만큼 멀어진 커서를 보니 괜히 통쾌하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날엔 애써 오래 앉아있지 않는다. 물론 마감일이 멀었을 때만 가능한 일이지만 이런 날 나는 더 열심히 걷는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길 위에서 어제 보이지 않던 것들을 마주했을 때, 만화처럼 머릿속의 전구가 뿅! 하고 켜지는 순간을 만난다. 잊지 않기 위해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중얼거린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노트북 앞에 앉는다. 물론 빈 화면 앞에 선 순간 머릿속이 다시 하얗게 되기도 하지만 일단 첫 문장은 시작할 수 있게 된다.
봄길을 걷다 어제 보지 못했던 것을 오늘은 보게 되는 것처럼, 나에게 글쓰기란 나를 새롭게 마주하게 해주는 행위이다. 과거의 나를 다시 기억해내고, 현재를 기록하고, 미래를 상상하며 쓴 내 글은 그동안 보지 못했던 나를 새롭게 꺼낸다. 여전히 갈색의 시간에 머물러 있는 듯한 날엔 늘 같은 자리인 내가 못마땅하고 밉게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삶의 겨울과 봄을 이어주는 이 시간의 의미를 이제는 알 것 같다. 꽃이 늦게 피었다고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피어난 꽃은 언제든 그 자체로 귀하기 마련이다. 먼저 핀 꽃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다. 그들도 오랜 갈색의 시간을 보냈을 터이니.
여전히 갈색인 봄일지라도 어제의 봄과 오늘의 봄은 분명 다르다. ‘봄’의 한가운데서 나만의 봄을 다시 정의한다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여서 ‘봄’>이 아닐까? 내가 글을 쓰는 한 내 삶은 언제라도 봄일 것이다. 아직 봄이다. 여전히 봄이라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