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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의 글 May 24. 2022

글을 쓰지 않는 이유

사실은 쓰고 싶은 이유.

 지방에 살다 일산으로 이사 온 20년 지기 친구를 만났다. 물리적 거리가 멀어진 탓에 자주 만나진 못했지만 수시로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며 지내온 친구다. 글방 모임을 마친 후 바로 만난 덕에 모임 이야기로 먼저 대화의 물꼬를 트게 되었다. 친구는 나에게 물었다.


“어쩌다 글쓰기 모임이야?”


 대답을 해주고 싶은데 아무 단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이었다. 2주 동안 고민하려고 했던 마지막 과제의 답을 지금 당장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친구에겐 ‘그냥!’이라고 말했다. 초등학교 시절 나를 예쁘게 봐주신 담임 선생님께서 교내 글짓기 대회부터 전국 독후감 대회까지 글쓰기 대회란 대회는 다 내보내 주셨던 그 기억이 좋아서, 함께 쓰고 서로의 독자가 되어주는 일이 재밌어서 등등 이런저런 간단한 이유가 생각나긴 했지만 그게 전부 일리는 없는 일이었다. 


 쓰는 이유를 찾고 싶은데 머릿속에는 쓰지 않아도 되는 이유만 떠오른다. 내가 글을 쓰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빈 화면을 빽빽하게 채우고도 넘칠 정도로 많은 것 같았다.

 하나, A4용지 1~2장 남짓의 한 편의 글에 마침표를 찍으려면 나는 며칠 내내 머릿속으로 계획을 짜고 최소 3~4일은 수시로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쓴다. 아무리 고치고 고쳐도 내 단어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흩날리는 단어들은 한 곳에 단단히 붙드는 것보다 단어들이 자유롭게 떠다니다 잊히도록 두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둘, 얼마 전 SNS 피드를 보는데 #출간예정이라는 해시태그가 눈에 들어왔다. 해시태그를 슬쩍 눌러보았다. 출간 예정이라는 태그가 포함된 글이 5000건을 넘는다.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더 많다는 말이 실감 난다. 이렇게 잘 쓰는 사람이 많은데, 나까지 쓸 이유는 없지. 잘 쓰인 글을 열심히 읽기만 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셋, 쓰다 보면 더 잘 쓰고 싶어 진다. 차마 티 낼 수 없는 마음 깊은 곳에서 활활 타오르는 욕망을 마주하는 것이 두렵다. 

 

 그럼에도 자꾸 쓰고 싶었다. 써야 할 것 같았다. 


 기록을 좋아했다. 긴 글을 쓴 기억은 대학시절 과제가 마지막이었지만 다이어리, SNS 등 여러 방법으로 짧은 글을 남겨왔다. 최근 2000년대 초, 중반을 휩쓸었던 싸이월드에서 사진을 다시 복원하기 시작했다. 인생의 흑역사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며 싸이월드의 재오픈을 두려워하는 지인들 사이에서 나는 홀로 설렘을 느꼈다. 매일같이 미니홈피를 들락날락하며 20대의 나를 기다렸다. 


<고은아님의 추억을 사진첩에 담았습니다. 싸이월드 사진첩의 소중한 추억들을 확인해 보세요.>

 

 드디어 사진첩이 열렸다. 다시 만난 싸이월드 사진첩엔 3200장의 사진이 있었다. 밤늦도록 사진을 내려보며 혼자 깔깔거리다 친구들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눈물 날 정도로 웃기도 하고 찐한 그리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 시절의(지금도 비슷하지만) SNS의 의미는 ‘나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어! 부럽지? 흥!’ 이 아닐까? 그 시절의 내가 잘 살고 있어 다행이었다. 인생의 황금기, 하이라이트가 있다면 바로 그때였다.

 

 인생의 하이라이트를 기록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건 내 인생의 비하인드를 다독여주는 일이었다. 화려한 조명은 뒤로 한 컴컴하고 어두운 그림자 같은 나에게 다시 손 내밀어 줄 시간이 필요했다. 숨겨왔던 나를 하나하나 꺼내는 일, 글 쓰는 행위를 통해 내 삶의 비하인드와 마주하고 다시 새 옷을 입혀주는 시간이 나에겐 간절하다.

 

 운전을 하다 보면 창경궁 돌담길의 무성한 가로수들 사이에 왠지 허전한 나무 몇 그루가 눈에 띈다. 자라고 싶은 만큼 마음껏 자랄 수 있다면 나무의 삶에 그만한 행운도 없겠지만, 안타깝게도 거리의 가로수들에겐 주기적으로 행해지는 전지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 길을 지날 때면 쑹덩쑹덩 잘린 나뭇가지 끝에서 돋아난 작은 새 잎이 잘 자라고 있는지 매번 확인하게 된다. 나무의 상처를 가려주는 새 순이 나에겐 글이 아닐까? 피하지 못한 상처 위에 개의치 않고 솟아오른 새 순, 나무가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새 순 같은 나의 글.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고 싶지만 이유 없이 그냥 쓰고 싶다. ‘글’을 생각하면 느껴지는 묘한 긴장감이 여전히 좋다.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글을 쓰는 일은 그 자체로 내 일상의 가장 유의미한 일이 되었다. 아이들을 재우며 같이 잠이 들었다 눈을 번쩍 뜨고 샤워까지 마친 지금은 새벽 1시 23분, 글쓰기 참 좋은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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