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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의 글 Jun 21. 2022

여름, 기억

당신의 여름은 안녕한가요? 

 ‘신나게 놀고, 맛있게 먹고, 달콤하게 잠자는 것’이 목표인 학교가 있었다. 그 당시엔 대안학교라 하면 지금의 인식과는 많이 달랐고, 요즘 어린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님들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발도르프 교육도 흔치 않았다. 어린이집, 유치원 등의 기관에서 주기적으로 하는 숲 활동, 혹은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참석하는 전문 강사님과의 숲 놀이라는 개념도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6학년 여름이었다. 나는 가평군 두밀리에 위치한 두밀리 자연학교에 다녔다. 정식 교육과정이 있는 학교는 아니었다. 토, 일 일주일에 단 이틀만 갈 수 있는 비정규 대안학교였다. 젊은 시절 교통사고로 전신 3도 화상을 입고, 이미 모두 타버려 더 이상 탈 것이 없어 ET라고 불러 달라고 하신, ET 선생님이 아이들을 위해 만든 학교였다. 주로 ET 선생님과 뜻을 같이 하는 공교육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찾아왔다. 6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서는 매주 주말을 우리에게 반납하고 38명인 반 아이들을 두 조로 나눠 자연학교로 데리고 가 주셨다. 야외 취침이 가능한 5월~9월에는 1박 2일의 일정으로 진행되었고 늦가을엔 당일치기로 사과나 고구마를 수확하러 다녀오기도 했다. 보통 격주로 참여할 수 있었지만 간혹 결원이 생기면 연속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도 생겼다. 당시 부의 상징이었던 걸스카우트 단원이 되지 못한 나에게 야영은 달콤한 경험이었다. 결원이 생기는 날엔 선생님을 졸라 이름만 도우미를 자처하며 매주 열심히 따라다녔다.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 점심을 먹고 여벌 옷과 칫솔만 챙겨 다시 학교에서 모인 우리는 선생님과 함께 버스를 타고 청량리역으로 갔다. 가평은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한 시간 남짓 거리인 가까운 곳이었다.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동안 어느새 가평역에 도착해 있었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내린 다음 다시 버스를 탔다. 기차역에서 20~30분 정도 들어가면 우리의 목적지인 두밀리가 나왔다. 


 자연 학교에서는 시멘트로 만든 회색 건물을 찾아볼 수 없었다. 강당, 식당 등 다용도로 쓰이는 커다란 천막, 그리고 잠을 자는 야외 텐트 몇 개가 전부였다. 자연학교에 도착한 우리는 커다란 천막에 짐을 대충 던져 놓고 일단 우르르 밖으로 뛰어나갔다. ET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바로 개울가로 갔다. 낮지도 깊지도 않은 적당한 개울에서 차가운 물만 뿌려가며 놀았을 뿐인데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개울에서 위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까치발로 서야 얼굴이 빼꼼 나올 정도의 깊이의 계곡을 만날 수 있었다. 이곳에선 주로 ‘다이빙 놀이’라 칭했던 놀이를 했다. 용기 있는 친구들(생김새와 다르게 용기가 없었던 나는 못 함)이 첨벙첨벙 뛰어내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해볼까? 말까? 고민하며 발만 동동 굴렀던 기억도 난다. 


 해가 살짝 누그러지면 물놀이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었다. 다시 모인 곳은 텃밭이었다. 시기에 따라 달랐지만 씨앗을 뿌리거나 모종을 심을 때도 있었고 감자 등의 농작물을 캐기도 했다. 흙을 뚫고 나온 여러 곤충, 벌레들을 마주하면 으악! 비명이 절로 나오기도 했지만 벌레의 공포보다는 놀란 친구를 다시 놀리는 나름의 재미가 더 컸다. 텃밭일이 끝나면 저녁 식사 시간이 되기 전까지 각각의 텐트에서 자유 시간을 보냈다. 네다섯 명의 친구들과 한 텐트를 배정받았다. 요즘 흔히 사용하는 캠핑 장비처럼 숙면을 도와줄 수 있는 도구들은 하나도 없었다. 말 그대로 텐트와 이불만 덩그러니 있었다. 텐트의 주인 개구리와 동침하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 


 텃밭을 반찬삼아 저녁을 먹었다. 이곳에서 편식하는 친구들은 거의 없었다. 어떤 반찬이 나와도 달게 먹을 수 있었다. 해가 지면 캠프파이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남몰래 좋아했던 남자아이에게 말을 걸고 싶은 마음에 힐끔힐끔 쳐다보기도 하고 고백을 빙자한 진실게임을 하기도 했다. 

13살의 여름은 이렇게 서서히 익어갔다. 


 1박 2일 자연 학교에서의 하이라이트는 여름밤에 만날 수 있었다. 이곳에선 일찍 자러 들어가라고 잔소리하는 어른이 아무도 없었고 정해진 취침 시간도 없었다. 캠프파이어와 진실게임으로 소란해진 마음들이 가라앉으면 선생님들의 통솔 하에 밤 산책을 떠났다. 반딧불이와 별자리 구경을 위한 산책이었다. 

 

 서울의 밤은 아무리 늦은 시간이 되어도 밝았다. 온 집안의 불을 꺼도 어디선가 새어 들어온 불빛 덕에 곧장 시야가 밝아지곤 했다. 하지만 두밀리의 밤은 달랐다. 말 그대로 칠흑 같이 어두웠다. 꽤 늦은 시간이었다.

도로를 오가는 차가 끊길 즈음 밤 산책길을 나섰다. 삼삼오오 서로의 손을 잡고 앞사람의 등을 쫓아 걸었다. 가로등도 없던 탓에 보이는 건 거의 없었지만 물 흐르는 소리, 개구리 소리, 풀벌레 소리는 점점 또렷하게 들려왔다. 젖은 흙냄새와 풀 향기도 코 끝으로 스며들었다.  

 

 한참을 걷다 보면 넓은 공터가 나왔다. 선생님께서는 모두 땅 위에 누워 보라고 하셨다. 우리는 모두 그 자리에 털썩 누웠다. 어둡게만 느껴졌던 밤하늘에서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운이 좋은 날엔 별똥별을 보기도 했다. 한낮의 열기가 식지 않은 듯 포근하고 따뜻한 땅 위에 누워 별을 바라보며 이곳에서 그냥 잠이 들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눈을 크게 뜨고 별을 바라보다 다시 눈을 지그시 감기를 반복하던 순간이 여전히 생생하다. 텐트로 돌아오는 길은 어쩐지 가는 길보다 짧게만 느껴졌다. 이미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더 놀고 싶은 아쉬운 마음은 꾹꾹 누르고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친구들과 나란히 꼭 붙어 누워 잠을 청했다. 

꿈같은 여름밤이었다.  

 

 얼마 전, 20대 때부터 꿈꿨던 세계여행을 5개월째 진행 중인 한 젊은 여성의 라이브 방송을 우연히 본 적이 있었다. 누군가 그녀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을 묻자 그녀는 ‘가장이요? 가장 행복한 순간은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본인을 수시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아주 작은 부분에서부터 행복을 느끼기 때문에 특별히 더 행복한 순간은 없다고 했다. ‘지금, 제 이마 한쪽에 햇빛이 닿고 있죠? 전 지금 이것도 행복해요.’ 야외에서의 방송 중 추위를 느낀 그녀는 이마를 비춰주는 햇빛 한 줌에도 행복을 느낀다고 답을 하였다. 


 해는 길고 달은 짧은 여름밤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두밀리에서의 밤이다.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날을 생각하면 여전히 등 뒤에선 온기가 느껴지고 눈앞은 별천지로 바뀐다. 피부 알레르기가 있는 나에겐 환절기만큼 힘든 계절이 여름이다. 한낮의 햇빛이 닿으면 피부는 거칠어지고, 낮에 오래 걷느라 땀을 흘리면 몸 이곳저곳이 간지럽기 시작한다. 평소에도 숙면을 취하진 못해 두세 시간마다 깨곤 하지만 여름엔 한 시간마다 깨는 날이 더 많다. 그럼에도 내가 여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모두 여름밤의 작은 조각들 덕분이다. 여름은 작은 행복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계절이다. 이른 저녁 상을 정리하고 창 밖을 내다보았을 때의 하늘빛, 낮의 열기가 빠진 건조한 바람, 해 질 녘의 걷기, 밤 산책 후의 샤워, 모두 잠든 밤 얼음물을 마시며 읽는 소설책, 오랜 친구와 야외 테이블에 앉아 마시는 시원한 생맥주까지.. 나에게 여름의 행복은 이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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