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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의 글 Jul 05. 2022

여름 여행자의 편지

당신의 여름은 어떤가요?

 저는 지금 제주에 있습니다. 여름휴가라고 하기엔 조금 이른 여행을 왔어요. 보통 결혼기념일이 있는 10월 말에 공식적인 휴가를 떠나곤 하는데 결혼 10년 만에 처음으로 여름 여행을 떠나봅니다. 최근 바빠진 회사 일정으로 3년을 정신없이 일만 하던 남편이 올해 하반기엔 쉬기 어려울 것 같다며 1년 치의 연차 중 5일만 남겨두고 휴가를 신청했습니다. 제가 주부 번아웃을 호소하는 동안 아마 남편은 그 나름의 지친 감정이 있던 것 같아요. 일단 멈추기로 했습니다. 총 13박 14일, 네 가족 역사상 가장 긴 여행이 되겠네요.


 홀 몸이었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어디든 훌쩍 떠나지 싶은데, 올해 10살이 된 딸아이와의 여행은 시작부터 쉽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장기간 결석을 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여행 전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1년 넘게 태권도를 배운 아이의 첫 국기원 심사가 여행 기간과 겹쳐 심사를 2달 후로 미뤄야 했던 점도 불만이었지요. 이미 작년 9살 가을 여행에도 겪었던 치레였습니다. 다행히 9살엔 좋아하던 ‘수학’이라는 과목을 10살이 된 지금은 싫어하게 되었고, 여행을 가면 수학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조금 안도하는 눈치였어요. 하지만 수학 공부를 벗어난 기쁨은 잠시, 수시로 오르락 내리막 하는 아이의 감정을 살피는 건 여행 내내 제 몫이 되었습니다.


 물론 저도 긴 여행을 앞두고 마음이 마냥 좋았던 건 아닙니다. 아이를 키우기 전에도 그랬는지 이제는 까마득한 기억이 되어 버렸지만, 아이를 낳고 저는 일정한 루틴을 유지하지 않으면 불안에 빠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루 식사 시간, 취침에서 기상까지 어느 하나 일정한 틀에서 벗어나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어요.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란 지금은 패턴이 무너져도 바로 회복이 가능한 나이가 되었지만 이번엔 다른 걱정이 생겼습니다. 긴 여행 후 제 일상이 무너지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을 품기 시작한 거지요. 하지만 걱정도 잠시, 비행기 티켓과 숙박을 예약하자마자 잊고 살았던 여행의 설렘을 느꼈어요. 여행의 묘미를 느끼기 가장 좋은 순간은 여행을 기다리는 하루하루가 아닐까요? 적어도 저에겐 그렇습니다.


 신랑의 오랜 로망은 차를 싣고, 배를 타고 섬으로 떠나는 일이었어요. 드디어 꿈을 이루게 되었지요. 먼저 떠난 신랑의 뒤를 따라 아이들과 저는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떠났습니다. 아이들과 구름을 구경하는 사이 착륙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제주의 첫날은 공항 근처 시장에서 저녁을 먹고, 간단한 간식을 사는 걸로 마무리했습니다.


 아이들과의 여행에서 계획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눈앞에 바다가 지천인 이곳에서 아이들의 눈은 내내 바다로만 향하고 있거든요. 이럴 땐 모두의 평화를 위해 아이들을 요령껏 설득해야 합니다. 안개가 가득한 제주의 오전엔 오름이나 숲 등을 걸어 보는 건 어떨까? 점심을 든든하게 먹은 후 바다에 가면 실컷 물놀이를 할 수 있어, 하며 아이들을 살살 달래 봅니다. 엄마의 간절한 (협박의) 눈빛을 마주한 아이들은 곧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오늘로 제주 6일 차, 지금은 어느덧 하루가 저물어 가는 시간입니다. 치유의 숲에 다녀온 후 이른 저녁을 먹고 남은 가족들은 숙소에서 휴식을, 전 노트북을 들고 숙소 앞 카페에 나와 차가운 커피를 옆에 두고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편지를 쓰러 왔지만 두 손은 키보드가 아닌 핸드폰으로 먼저 향하더군요. 일단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핸드폰을 열어 오늘 온 메시지들을 쭉 다시 훑어보았습니다.


‘어디 여행 중이여?’

‘날씨는 좋고? 여기는 더워’


 오후 12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온 친정 엄마의 메시지입니다. 아마 일을 하시다 점심시간 즈음 보낸 메시지 같아요. 답장 대신 몇 장의 사진을 보냈어요. 카페에서 흘러나온 음악 때문일까요, 아니면 창 밖의 노을과 바다 때문일까요, ‘이쁘네’ 세 글자의 답에 괜히 서글픈 감정이 들었습니다. ‘엄마, 아이들 조금만 더 크면 우리 둘이 이런 곳 자주 다니자!’라고 기약 없는 약속을 건네며 대화를 마무리했습니다.

 

친정 엄마의 지난여름을 잘 알고 있습니다. 23살에 결혼한 엄마는 아빠의 의견에 따라 여름이면 늘 시댁인 전라도로 이름만 휴가인 여행을 떠나야 했어요.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지 10년 정도 되었으니, 결혼 후 2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의 여름을 그렇게 보냈네요. 엄마가 가기로 한 날이면 할머니는 자연스럽게 부엌일을 놓고 엄마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셨어요. 서울 집에서 6시간 남짓 지하철과 기차, 그리고 택시를 번갈아 타며 도착한 시골에서 엄마는 잠시 엉덩이 붙일 틈도 없이 바로 부엌으로 향했습니다. 엄마의 휴가는 밥상과 술상을 수십 번 번갈아 차려야 끝나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어린 저는 근처 사촌집을 오가며 노느라 바빴습니다.

  

 엄마는 ‘엄마’라는 이름을 갖고 태어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제가 엄마가 된 후에서야 친정 엄마의 젊은 날이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래된 앨범 속에서 싱그러운 엄마의 여름을 본 적이 있습니다. 긴 생머리, 발랄한 앞머리, 그리고 화사한 미소까지. 앨범 속 젊은 엄마는 주먹만 한 복숭아를 손에 들고 입에 넣는 시늉을 하며 환하게 웃고 있었어요. 이 사진이 아직도 남아 있어 정말 다행입니다. 엄마에게도 ‘참 아름답고 고른 날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저를 안도하게 합니다.


 서울엔 제법 큰 비가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기 제주의 날씨는 예보가 아닌 중계를 한다고 할 정도로 지역마다 다르기에 저희 가족은 아침이면 날씨 정보를 수집하고 적당한 곳을 찾아 메뚜기 떼처럼 떠돌고 있습니다. 해가 쨍한 날엔 바다로, 흐린 날엔 숲으로. 까맣게 익어가는 제주의 우리는 그래도 제법 즐거운 것 같습니다.


 당신의 여름은 어떤가요, 저는 당신의 여름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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