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을 돌보며 나를 키웁니다,문희정,문화다방>
‘섭리’라는 단어에 대해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두 아이와 함께 노래를 듣고 있었다. 노래 가사 중 시간의 ‘섭리’라는 단어가 나오자 5살 동생이 누나에게 ‘섭리’의 뜻을 물었다. 내가 먼저 쉽게 설명해 줄 단어를 떠올리기도 전에 누나가 먼저 대답을 했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는 게 섭리야.”
‘섭리’라는 단어를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검색하면 몇 가지 뜻이 나온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섭리’의 뜻은 ‘자연계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와 법칙’이다. 글방의 시작을 앞두고 겨울 문장을 수집하는데 ‘섭리’라는 단어가 자꾸 생각났다.
시간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흐른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리의 삶도 흐른다. 내 삶은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지나간 계절이 다시 돌아오는 것처럼 내 인생도 사계절을 무수히 반복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인생은 어느 계절에 닿아 있을까.
엄마가 되기 전까지 나의 삶은 늘 봄~겨울의 어딘가에 있었다. 모든 가능성을 품고 꿈꾸던 ‘봄’도 있었고 뜨겁게 타오르던 ‘여름’도 있었다. 작은 바람에도 휘청이던 ‘가을’도 있었다. 물론 혹독한 ‘겨울’도 있었다. 삶의 계절은 돌고 돌았다. 자연의 섭리처럼.
엄마가 된 후의 내 삶은 길고 긴 ‘겨울’을 지나는 느낌이었다. 매서운 바람과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이었다면 어떻게든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 치며 치열하게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겨울은 오히려 적막하고 고요해 시작도 끝도 가늠할 수 없는 긴 겨울에 가까웠다.
첫 임신 4~5개월쯤 일을 그만둔 후 9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첫째 4살쯤 파트타임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으나 둘째 임신으로 일을 오래 할 순 없었다. 4살 터울의 둘째가 3살이 되어 어린이집에 갈 때까지, 7년 정도의 시간이 나에겐 긴 겨울 같았다. 내 인생의 사계절이 언제 멈췄는지도 모르고 아이들을 살피며 조용한 시간을 흘려보냈다. 내가 곱게 품고 있던 씨앗들이 새싹이 되어 기관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내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지금 어디 있는 걸까.
앞서가는 엄마들 사이에선 ‘엄마의 성장’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시작했다. 제자리에 머무르는 것뿐이었는데 점점 뒤처지는 느낌이 들었다. 빠르게 나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움츠리게 된다. 내 안에서는 무언가 쌓아가려 하는데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으니 마음만 조급해지곤 했다. 부러운 마음에 괜히 거꾸로 행동하고 싶어졌다. 난 조금 더 천천히 가기로 마음먹는다. 지금이 겨울의 시간이면 어때. 이 글을 읽으며 나만의 겨울을 다시 정의하기로 했다.
p.87 지켜보는 일.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조급해져도 짐짓 느긋한 척 여유를 부려 보는 일. 넘치지는 않는지 부족한 건 아닌지 관찰하되 나서지 않는 일. 내가 짐작하지 못하는 땅 밑의 일이 의심스러워도 섣불리 파헤치지 않고 기다리는 일. 겨울은 가드너에게 그런 시간이다. 그 시간을 잘 견디면 멈춰있었던 것이 아니라 조용히 살아있었음을 알리는 꽃이 핀다.
<정원을 돌보며 나를 키웁니다, 문희정, 문화다방>
혼자 또는 함께 글을 읽는다. 꾸준한 걷기로 몸과 마음을 다진다. 차분하게 나를 들여다본다. 차곡차곡 나를 다지는 시간을 쌓는다. 당장 살림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지내도 될까 하며 ‘내가 짐작하지 못하는 땅 밑의 일이 의심스러워도’ 조급해하지 않기로 한다.
겨울의 끝엔 봄이 반드시 온다. 이 겨울이 지나면 나에게 어떤 봄이 올지 알 수는 없지만 어떤 봄이든 기꺼이 맞이할 수 있는 단단한 뿌리를 위해 내 이야기를 쌓아가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