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 비용,데버라리비,플레이타임>
영화 <매트릭스>에는 ‘파란 약’과‘빨간 약’ 이야기가 나온다. ‘빨간 약’이란 자신이 몰랐던 세계를 경험하게 해주는 약이다. 위험과 고통은 따르지만 진실의 모습을 인식하고 점점 주체적인 삶의 모습으로 변화해 나갈 수 있다. ‘파란 약’은 자신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삶, 질서 있는 세계 속에서 주어진대로 지금처럼 살아가게 된다고 한다.
태어나며 자연스럽게 정해진 ‘여성’이라는 이름의 삶을 살아오며 겪는 어려움은 사실 꽤 오랫동안 내 관심 밖이었다. 여중-여고-여대를 다녔고 졸업 후엔 여성들이 주를 이루는 회사에 다녔다. 내가 ‘여성’이라 얻는 불평등은 거의 없었다. 문제는 결혼 후였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답답함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유를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어느 날은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르다 어느 날은 또 그런대로 살만하다 느끼는 날들의 반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삶에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들어오게 되었다. 사진 스튜디오를 통해 유출된 둘째 아이의 백일 사진이 어떤 한 사이트에 오르면서였다. 그들은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으로 ‘남자’라는 성별을 가진 백일부터 돌 정도의 아기들 사진을 두고 입에 담지 못할 조롱의 말들로 게시판을 가득 채웠다. 그 말들을 손으로 옮겨 적으며 고소장을 준비하는 내내 괴로움을 느꼈다.
상대에 대한 맹목적인 비판과 조롱이 페미니즘일까?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인 첫인상을 받은 동시에 나에겐 다른 걱정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나에게도 딸이 있었다. 아주 어린 딸.
‘페미니즘’ 관련 도서를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며 내가 경험했던 일로 인한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는 해소되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가 바라는 건 어느 한쪽이 이기고 지는 사회가 아니었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였다. 내가 원하는 삶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질문의 답에 힌트를 준, ‘빨간 약’ 같은 책이 바로 데버라 라비의 <살림 비용>이다.
<살림 비용>은 ‘남자와 아이의 안위와 행복을 우선순위로 두어 오던 가정집이라는 동화의 벽지를 뜯어낸’ 50대 여성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서재를 떠나 침대로, 그다음엔 헛간으로 자신의 공간을 이동하며 치열하게 글을 쓴다. 가부장제를 벗어난 후 얻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치러야 할 살림 비용은 더 늘었지만 그녀는 ‘자기 이름을 지워버린 사회’에서 다시 이름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p.160
여자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기 위해 자기 이름을 지워버린 사회의 서사와 결별할 때, 그가 맹렬한 자기 혐오에, 더 미칠 것만 같은 고통에, 눈물이 멎지 않는 회한에 빠지리라는 게 사회 통념이다. 이런 것이 여자를 위해 마련된, 그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손에 쥘 수 있는 가부장제의 왕관에 박힌 보석들이다. 눈물지을 순간이 넘치는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아무런 가치도 없는 그 보석들에 손을 뻗느니 검고 푸르스름한 어둠을 두 발로 통과해 지나는 편이 낫다.
작가는 독자에게 가부장제를 벗어나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이혼 후의 즐거움만을 말하지도 않는다. 살림 비용이자 삶의 비용을 치르면서 얻은 자유, 엄마이자 작가인 주체적인 ‘나’의 모습만을 보여 준다.
내 딸이 살아갈 여성의 삶을 상상해 본다. ‘우리 딸은 엄마처럼 살지마.’하는 이야기는 부모님 세대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인 줄 알았다. 급하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변치 않는 난제들은 여전하다. 여성이라서 당연하게 치부되는 일들을 내 딸은 겪지 않길, 자신만의 힘을 가진 여성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먼저 여성의 삶을 제대로 일궈 나가야 한다. 이제 나는 당연한 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주체적으로 사는 삶을 살기 위해 치러야 할 나만의 살림 비용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