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통의 글 May 31. 2022

전업 주부도 번아웃이 오나요?

 번아웃 증후군: 한 가지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극도의 피로를 느끼고 이로 인해 무기력증, 자기혐오, 직무 거부 등에 빠지는 증상을 말한다. `연소 증후군', 혹은 `탈진 증후군' 등으로도 불리고 있다.


 '백수가 과로사한다.' 지인들에게 종종 하는 말이다. 첫 아이 임신 5개월쯤 일을 그만둔 후, 그러니까 일명 돈을 버는 일을 그만둔 후 나는 줄곧 나를 '백수'라고 생각을 했다. 잘하면 본전 허술하면 바로 티 나는 집안일, 끝없는 돌봄 노동, 친정과 시댁을 오가며 모든 잔일을 도맡아 해 온지 어느덧 10년 차. 가족들의 시간에 맞춰 살다 보니 이제 내 의지로 선택 가능한 일은 거의 없다. 

 잠이 깨기도 전에 가족들보다 먼저 침대를 나서야 했고, 아침을 먹기 싫어도 식구들의 아침은 차려야 했다. 아이의 등교에 맞춰 발을 종종 거리다 아이를 학교에 보냈다. 한 돌리자마자 옆에선 둘째 아이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아침엔 서로 기분 좋게 헤어지는 게 목표이기에 서로 심기를 건들지 않는 선에서 서둘러 준비를 시키고 등원 길에 나선다. 출근이 늦은 신랑은 그쯤 어슬렁어슬렁 거실로 나와 '오늘 약수동?(대충 본인도 회사에 데려다 달라는 뜻..)'을 외친다. 모른 척하고 싶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은 오전에만 3번의 셔틀을 한다. 


 3명을 모두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온 집안의 문을 활짝 열고 떠난 식구들의 잔해를 정리한다. 모든 집안일을 내 몫으로 생각하는 나는 매일 청소를 하지 않으면 마음이 내내 어지럽다. 혼자 있을 때 하고 싶은 일들은 뒤로 미루고 큼직한 집안일을 처리한다. 친정에선 큰 딸, 시댁에선 작은 며느리의 역할을 다 하기 위해 양쪽을 번갈아 다니며 잔심부름을 하기도 하고, 텅 빈 냉장고를 채우기 위해 대형 마트를 다녀오기도 한다. 아이들의 하원까지 2시간 남짓의 시간이 남았다. 산책을 좋아하는 나는 한 시간 반 정도 걷고 오면 기운을 얻곤 하지만 햇빛 알레르기로 온 팔에 두드러기가 올라오는 초여름엔 낮 산책도 여의치 않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엔 동네 커피숍에라도 앉아 책이라도 볼까 하다 이내 마음을 접는다. 집에 있는 원두를 꺼내 커피를 내리고 일단 멍하니 식탁에 앉는다. 

 

 3시가 지나면 오후 육아가 시작된다. 일명 셔틀 투어를 떠난다. 첫째와 둘째를 바지런히 픽업해 학원, 병원 등 볼 일을 마치고 보쌈하듯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돌아온 아이들은 허물을 벗고 걷는 걸음마다 흔적을 만든다. 보람도 없이 집은 다시 자연의 상태로 돌아간다. 큰 아이는 며칠째 숙제에 필요한 자료를 집에 가져오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께선 아이가 학습에 어려움을 보인다는 메시지를 보내셨다.(물론 도움을 주신다는 말씀도) 둘째 아이는 코로나 확진 이후 여전히 호흡기 증상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은 병원에서 약을 받는다. 4~5일 치 약을 받고 호전을 보여 약을 끊으면 여지없이 3일 후 다시 기침이 시작된다. 아이의 기침 소리만 들어도 한숨이 먼저 나온다. 두 아이와의 반복되는 일상이 묵직하게 내 어깨를 누른다.


 신랑은 오늘도 늦는다고 한다. 오롯이 두 아이의 눈이 나에게로만 향하는 게 썩 반갑지 않다. 아이들은 쉴 새 없이 투닥거린다. 한 명의 엄마를 사이에 두고 두 아이는 서로 엄마를 찾는다. 결국 빽! 하고 소리를 지른다. "애들아, 엄마는 한 명이잖아!" 폭풍 같은 저녁시간을 보내고 노트북 앞에 앉을 때쯤 신랑이 퇴근을 한다. "저녁은?", "아냐, 생각 없어" 주섬주섬 일어나 다시 주방 불을 켠다. 하루 종일 해낸 일이 이렇게나 많은데 스스로를 백수라 생각했다니?


 "전업 주부에게도 번아웃이 오나요?" 


 브런치에 발행 버튼을 누르면 관련 키워드가 나온다. 번아웃이라는 키워드 옆엔 워킹맘이라는 단어만 놓여있다. 워킹맘이라는 단어 대신 엄마라는 단어를 선택한다. 전업 주부에게도 번아웃은 온다. 경제적인 부분을 모두 끌어안은 남편 덕에 책 모임, 글방, 산책 등 내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내가 꾸려가는 살림에 전혀 볼멘소리를 안 하는 남편을 만난 건 정말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그 밖의 모든 일을 온전히 감내해야 하는 엄마의 삶, 나에게도 번아웃은 충분히 올 수 있다.

 

 '번아웃'이라는 단어는 주부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뭐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다고. 주부가 이 정도 일도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하지만 이번엔 다르게 생각하기로 했다. 전업 주부에게 찾아온 번아웃을 인정하고 흠뻑 빠져보기로 했다. 한없이 가라앉는 감정을 모른 척하지 않기로 했다. 나만의 구덩이가 깊어진다면 그 안에서 오랜 시간을 보낼 마음의 준비도 하였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작가의 이전글 확진자이지만 엄마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