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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의 글 Mar 31. 2022

확진자이지만 엄마입니다.

코로나19 가족 확진 기록.

 헉, 두 줄.


 지난 목요일부터 몸의 이상신호를 느꼈던 나는 자가진단 키트를 했다. 만성비염이라 환절기엔 컨디션이 늘 좋지 않은 편이지만 코로나 전조증상은 확실히 달랐다. 우린 금요일에 할 일이 있어 온 가족이 함께 타 지역에서 하루를 묵기로 되어 있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던 나는 가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이야기를 했으나 신랑은 가서 쉬게 해 준다며 함께 가기를 원했다. 결국 금요일 낮부터 밤새 고열과 오한에 시달렸고, 금요일 밤 매직아이 수준으로 희미했던 자가 진단 키트는 토요일 아침 선명한 두 줄을 보여주었다.


 이제부터 난 확진자다.

내가 확진 판정을 받은 곳은 거주지가 아닌 타 지역이었다. 격리 장소를 결정해야 했다. 외국에 계신 가족분의 집을 살피러 간 것이기 때문에 빈 집인 그곳에서 나 혼자 남아 격리를 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신랑이 말했다. 하지만 난 두 아이의 엄마였다. 아이들이 마음에 걸렸다. 아빠의 손길로는 아이들에게 증상이 나타나도 감지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내 몸의 통증보다는 아이들 걱정에 뜨거운 한숨만 연신 뱉어냈다.

 

 일단 나만 이곳에 남아 격리로 하고 나머지 가족은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돌아가기 전 다시 한번 식구들에게 자가 키트를 내밀었다. 그냥 보내면 안 될 것 같았는데 역시나였다. 둘째의 키트에 희미한 두 줄이 떴다. 하는 수 없이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양성인 나와 둘째는 자차로 돌아가고 신랑과 첫째는 음성이기에 우리와는 격리를 하고 다른 차편으로 각각 돌아왔다.

 

 확진자이지만 난 엄마다.

 큰 아이와 신랑은 숙식이 가능한 시부모님의 공방에서 분리 생활을 하기로 하고 신랑은 집과 공방을 오가며 나와 둘째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사다 주기로 했다. 약 기운에 의지하며 어찌어찌 격리 첫날밤을 보냈다. 다음 날, 나를 제외한 3명의 가족은 동거인 검사를 위해 병원으로 떠났다. 검사 결과 아이 둘은 모두 양성, 신랑은 음성이었다. 무증상이었던 아이들이 열이 나기 시작하였다.

 

 내 몸이 회복되기도 전에 두 아이의 케어는 내 몫이 되었다. ‘음성이 죄는 아니잖아!’ 그러나 내 눈에 음성인 신랑은 죄인이었다. 하루 종일 누워만 있어도 모자를 몸을 일으켜 아이들을 살펴야 했다. 삼시 세끼, 세 번의 약, 증상 체크 등등 모든 일은 나의 몫이 되었다. 물론 아픈 상태에도 집안일을 외면하지 못하는 이상한 내 성격도 나를 괴롭히는데 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내 몸이 아프지 않았다면 기꺼이 할 수 있었던 일들이 아픈 내 몸 앞에선 버거운 일이 되어버렸다.


 잠복기로 추정되는 신랑도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 매일 아침 키트를 하고 출근을 했다. 방 한 칸과 화장실 한 곳은 신랑의 공간이 되었다. 오히려 격리를 당하는 건 신랑의 일이 되었다. 안타까운 상황이었지만 일단 내 회복이 더디니 그조차 보기 싫었다. 닫힌 방문을 열고 마스크를 벗겨 주고 싶은 충동도 들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신랑은 우리 가족 중 면역력 최약체가 아니던가? 신랑까지 양성이 되면 난 3명을 돌봐야 한다.


 내가, 그리고 내 아이들이 확진자가 되면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몸의 통증이 아니었다. 코로나19라는 전에 없던 전염병이 3년째 이어지며 결국 우리 집까지 파고들었다.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내 품에 온전히 안겨진 돌봄 노동의 무게는 여전히 나를 지긋하게 눌렀다. 내 몫의 무게는 시간이 흘러도 전혀 가벼워지지 않았다. 어쩌면 평생 벗어날 수 없는 무게일지도 모른다.  


 신랑 혹은 아이들이 먼저 확진이 되었다면? 나라도 걸리지 않겠다고 혼자 분리를 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들을 돌보다 결국 나도 같이 걸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미 벌어진 일 앞에선 바꿀 수 있는 것이 없다. 내 마음을 바꿔본다. 아이들이 많이 아프지 않아 다행이야, 셋이 함께 격리해서 다행이야, 그래도 이제 회복이 되어가고 있어, 가까스로 괜찮은 이유를 찾아내며 하루 하루를 보낸다.


 격리 6일째인 오늘, 잘 버티던 신랑이 이제야 양성 판정을 받았다. 우리 가족은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과 싸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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