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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의 글 Feb 03. 2022

살아 있다는 건

곧 사라질 나무를 마음에 옮겨 심어 두는 것.

 우리 동네 입구를 지키던 70년 된 가로수 두 그루가 밑동만 남겨진 채 잘린 적이 있다. 전 날까지도 멀쩡했던 나무 두 그루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인부들이 세 번째 나무를 베어내려고 하자 주민들이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관할 구청에 민원을 넣었다. 교통체증을 해소하기 위해 도로를 넓히는 작업이 시작되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무를 베지 않아도 그 일대의 교통체증을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방법도 있었다. 주민들은 지속적으로 항의를 했다 1인 시위로까지 상황이 악화되자 공사는 결국 중단되었다. 주민들은 이미 베어진 두 나무의 밑동이라도 다시 살리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베어진 두 나무는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3년 전,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왔다. 처음 집을 보러 왔을 때 내 눈을 사로잡은 건 거실과 작은방 창으로 보이는 커다란 은행나무와 이름 모를 작은 나무들이었다. 거실의 큰 창은 옆집 주택의 뒤편을 향해 있었다. 주택 뒤의 작은 풀밭과 이어진 돌산 가장자리의 나무들, 그리고 틈 사이사이 식물들이 나에겐 작은 숲처럼 보였다.

‘이 돌산을 깎아내면서까지 새 집을 짓는 일은 없겠죠?’ 한양도성을 곁에 둔 동네 특성상 개발에 제한이 걸려 있는 땅이 많았다. 계속되는 재개발 무산으로 오래된 주택을 헐고 신축 빌라를 짓겠다는 움직임이 한창 시작되던 때였다. 절대 그럴 일이 없다며 안심하라는 말을 그대로 믿었다.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 첫눈에 반한 이 집으로 몇 달 후 이사를 왔다.

       

 낯선 소리에 눈을 떴다. 거실로 나가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무시무시하게 생긴 톱과 망치를 들고 돌아다니는 인부들의 모습이 보였다. 저 아래에서는 주택을 철거 중이었고 내 눈앞에선 작은 나무들이 베어지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중장비로 엄청난 소음을 내며 돌을 깨부수는 작업이 몇 주간 계속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가장 큰 은행나무는 건들지 않았다. 작은 희망을 품고 매일같이 은행나무의 생존을 확인했다. 매일 눈에 담던 풍경이 서서히 사라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는 건 고통이었지만 이 나무라도 꼭 살아남길 바랬다.

밖이 평소보다 더 소란스러웠다. 인부들이 의견을 나누며 애쓰는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은행나무가 베어지는 날이다. 하루아침에 베어진 70년 된 가로수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았음직한 은행나무가 처참하게 베어지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어떡하지....’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재개발이 확정되어 주민들이 모두 떠난 동네를 지나간 적이 있다. 빈 집들 사이 조용히 홀로 꽃 피우고 있는 목련 나무를 보았다. 1년 후엔 못 볼 나무다. 신호가 멈춰 있는 내내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떨어지는 나뭇잎만 봐도 아까워하고 강아지풀 하나도 마음 놓고 뽑지 못하는 아이와 살고 있다. 가지치기 작업 중 후드득 떨어진 나뭇가지만 봐도 속상해하는 아이가 내 곁에 있다.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이 나무에게도 ‘목격’이 있다는 문장을 읽었다. 말 없는 나무와 교감하며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서 감정을 나눠주는 아이의 마음이 한없이 귀하게 느껴진다. 다니카와 슌타로의 <살아있다는 건>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나에게 살아있다는 건 ‘곧 사라질 나무를 마음에 담아 두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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