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도로엔 차가 거의 없었지만 뿌연 시야 때문에 속도를 낼 수 없어 깜빡이를 켠 채 느린 속도로 달려야 했다. 뒷자리에 앉은 아이들은 본인들이 원하는 목적지가 아니라 뾰로통한 표정으로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도대체 바다는 언제 가는 거야?’ 아이들의 애타는 목소리를 뒤로 하고 우리 가족이 도착한 곳은 제주 동쪽에 위치한 백약이 오름이었다.
주차장 한쪽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부슬비와 함께 거센 바람이 불고 있었다. 완만한 경사도의 오름이었기에 날이 궂어도 올라가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아이들에겐 우비를 입히고 길을 나섰다. 오름과 살짝 떨어진 입구 길을 지나자 미스트를 뿌린 듯 흐린 눈앞에 커다란 오름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목적지가 보이자 뛰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멀리 영상으로 찍으며 천천히 오름을 향해 걸었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최대한 보존하기 위해 만든 좁은 통행로 양옆으로 무릎 높이의 풀숲이 우거졌다. 습기로 축축해진 풀들이 맨다리에 닿았다. 아침 내내 내린 비로 흙이 젖어 걷기엔 조금 미끄럽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 앞서 뛰던 둘째 아이가 그새 넘어져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천천히 가자’ 흙으로 물든 아이의 바지를 대충 털고 손을 잡았다. 다른 한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은 바로 가방에 넣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안개가 짙어졌다. 사람도 눈앞에 있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시각이 제한되니 가장 먼저 예민해지는 건 청각이었다. 작은 소리 하나에도 크게 반응했다. 처음엔 한두 가지 종류로 들리던 새소리가 점점 늘어 사방에서 들리기 시작하더니 난생처음 듣는듯한 풀벌레 소리까지 귓속을 가득 울렸다. 바람, 새, 풀벌레, 그리고 우리 네 식구만 존재했던 그곳에서 들었던 여름 소리는 이제 이맘때만 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여름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해 6월 말, 우리 가족은 이른 휴가로 13박 14일 제주 여행을 다녀왔다. ‘제주’라는 키워드 하나면 검색되는 수많은 유명 맛집, 관광지를 뒤로 하고 여행 전 세운 계획은 단 하나였다. 덥지 않은 오전엔 완만한 오름이나 숲 산책을 하고 오후엔 근처 바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무계획이 계획인 남편은 별다른 반발이 없었지만 아이들은 엄마의 독재 여행에 꽤 비협조적이었다. 코앞에 바다를 두고도 숲으로 이끄는 엄마가 꽤 원망스러웠을 터, 하지만 아이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엄마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짙은 흙냄새, 오랜 나무의 웅장함, 나무 기둥을 타고 자라나는 풀, 이끼, 이름 모를 버섯, 그리고 어느 숲에서나 꼭 만났던 야생 노루까지. 제주의 숲은 한 걸음 옮기기가 아쉬울 정도로 매번 경이로운 순간들을 안겨 주었다. 제주의 여름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고작 2주 머물렀지만 제주는 마치 나의 고향이라도 된 것 마냥 여름의 시작과 동시에 그리운 곳이 되었다.
어느새 1년이 지나 다시 여름이다. 제주의 여름이 아닌 서울의 여름이 시작되면 얼음통을 채우는 소리로 하루를 시작한다. 식구들이 모두 떠난 후 어질러진 집을 정리할 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노동주 삼아 시원하게 들이켜야 정신이 맑아진다. 통 속으로 쏟아지는 얼음 소리, 그리고 뜨거운 커피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녹아내리는 얼음 소리가 나에겐 마치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처럼 들린다.
마감이 코 앞이라 딴짓을 하면 안 되는 날이었지만, 맑은 바깥바람에 끌려 뒷산 산책을 마음먹었다. 글도 잘 풀리지 않고, 마침 글방 과제를 위해 도시의 여름 소리를 수집하는 중이었으니 마땅한 핑계도 있었다. 오랜만에 평소보다 조금 더 멀리 높은 전망대를 목적지 삼았다. 구석구석 선크림을 잘 펴 바른 후 모자를 썼다. 시원한 물 한 통을 챙겨 가볍게 집을 나섰다.
성곽길 초입에 이르렀다. 듣기 좋음직한 새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가장 먼저 들린 건 ‘구우 구우’ 하는 비둘기 소리였고, 성곽길을 지나 숲에 가까워지자 ‘피츄 피츄’(내 귀엔 이렇게 들렸다..)하는 새소리가 들렸다. 반가운 마음에 녹음 어플을 켜는 사이 소리가 멈추더니 귀여운 새소리는 이내 ‘까악 까아아아악’하는 까마귀 소리로 바뀌고 말았다. 근처 나무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이름에 걸맞게 새카만 까마귀가 힘껏 입을 벌려 소리를 내고 있었다. 먼 산에서 대답이라도 하듯 메아리처럼 ‘까아아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싱그러운 여름 소리를 기대했지만 뭔가 성에 차지 않았다. 소리 수집은 멈추고 걷기에 집중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다른 해보다 일찍 익은 황매실의 단 향이 코끝을 가득 채웠다. 풍요롭지만 넘치진 않는, 그렇다고 부족함도 없는 여름 숲을 조용히 걸었다. 전망대로 향하는 오르막 계단에 다다르자 옷이 젖을 정도로 땀이 났지만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 덕에 축축해진 옷이 찝찝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집에서 출발한 지 1시간 정도 지나자 드디어 목적지인 ‘말바위 전망대’에 도착했다. 내가 자리를 잡은 곳은 전망대 쪽이 아니라 널찍한 바위, 바위에 앉아 바람을 쐬며 광화문 쪽을 바라보는 순간을 제일 좋아한다. 평일이라 그런지 등산객들이 거의 없어 홀로 여유롭게 이 자리를 독차지할 수 있었다.
다리를 주욱 펴고 자리에 앉았다. 반절 정도 남은 물을 시원하게 비웠다. 같이 오려다 못 온 친구를 위해 영상을 찍어 보내고 바로 ‘멍 때리기’에 돌입했다. 바람 사이로 딱따구리 소리가 들렸다. 거센 바람 때문인지 바위 옆 도토리나무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흔히 듣던 ‘스윽 스윽’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에 툭, 툭, 하는 둔탁한 소리가 더해지길래 자세히 나무를 바라봤더니 두껍고 단단한 도토리 나뭇잎이 바위에 부딪히고 있었다. 나뭇잎이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까지 찾아내다니? 귀를 기울여야 들리는 것들, 자세히 봐야 보이는 것들로 일상의 한 조각을 채워 넣는 기쁨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저 좋다고, 궁금하다면 일단 걸어 보라는 말밖에 할 도리가 없다.
집으로 돌아와 한참 글을 쓰다 근처 여중, 여고생들의 웃음소리가 창문 너머로 들어오길래 시계를 보니 오후 3시였다. 종일 창문을 열어두는 이 계절에만 들을 수 있는 아이들의 소리가 그저 반갑게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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