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 31》 앞에서

잭슨 폴록

by 책읽는아이린

다섯 번째 강의에서 추상표현주의 화가를 살펴보았다. 그중에 액션 페인팅으로 유명한 잭슨 폴록(1912 ~ 1956)이 인상에 남았다. 그는 무의식의 세계를 즉흥적이고 강렬하게 표현했다.


잭슨 폴록은 캔버스를 거부했다. 세워진 캔버스를 바닥에 눕혔고, 그는 붓끝을 물감에 담그는 대신 페인트 통을 들고 흔들었다. 물감을 위에서 자유롭게 떨어뜨렸다. 바닥 위의 캔버스에서 그는 걸으며 춤췄고, 구르며 선을 그렸다. 움직이는 몸 자체가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림 속에 들어가 있다.”, "붓이 나를 이끌고 간다"

그는 자신이 만든 선 사이를 걸었고, 물감이 튀는 소리를 들었으며, 그 물감의 중력과 속도를 감각했다. 그림은 더 이상 ‘그린 것’이 아니라 ‘일어난 것’이었다. 그의 작품은 기록이자 사건, 기억이자 흔적이었다.


폴록은 예술을 ‘보는 것’에서 ‘경험하는 것’으로 이끌었다. 정해진 구상에서 벗어나, 무의식과 즉흥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는 프로이트와 융의 이론에 매료되어 그 심연을 물감으로 토해냈다. 그의 ‘드리핑’은 감정의 분출이자, 질서 없는 세계에서의 자아 선언이었다.


비판도 있었다. 아이 장난 같다고, 의미가 없다고. 그러나 폴록은 전통적인 틀을 깨부수고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무엇이 예술인가?” “작가는 어디까지 관여할 수 있는가?” 그는 그림의 경계를 넓힌 것이 아니라, 아예 지워버렸다.


그의 그림은 정지된 이미지가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는' 대신 '마주해야' 한다. 마치 바람 소리를 듣듯, 파도에 젖듯, 그의 그림은 감상보다 체험에 가깝다. 색의 덩어리와 선의 조각 속에서 우리는 그의 호흡과 불안, 존재의 무게를 느낀다.

폴록의 예술은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살아 있는 행위다. 우리는 그 행위의 흔적 앞에 서서, 인간이 남긴 가장 즉흥적이고 격렬한 흔적을 본다. 바닥 위에서 그는 예술을 추는 무용수가 되었고, 물감은 그의 언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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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 31》앞에서


그림 앞에 섰어 거기엔 모양도, 구도도, 설명도 없었어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 그저 한동안 나를 가만히 흐르게 두었어

검은 선 사이로 흘러나오는 건 눌러두었던 말들

어둠은 한꺼번에 쏟아지지 않아 한 선 한 선
그는 선을 그은 것이 아니라 심연 속 무언가를 토해냈어
떨어지고, 뿌려지고, 흔들리고 마치 마음의 울분을 손으로 잡아
캔버스에 던지는 사람처럼


나는 그를 이해해보려 했어
어떤 말도 필요 없는 날, 지나간 기억들이 쏟아지는 날,
고요히 터지는 울음이 무언가를 세상 밖으로 쏟아내야만
내가 나를 견딜 수 있었던 날 그림은 그런 날의 형상이야

붓은 단지 도구였고 그의 마음을 흔든 건 손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들끓는 그 무엇이었어

슬픔, 분노, 두려움
말로는 닿지 않는 가슴속 어두운 덩어리들


그림 앞에 선 나는 알았어
그는 그것들을 그려낸 게 아니라

쏟아버린 거였어

나는 그림 앞에서 나 역시 흘려보내고 있어
내 안에 고여 있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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