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움 미술관을 다녀와서
여름 끝자락, 빗방울이 차창을 두드린다. 한강을 건너며, 리움 미술관에서 어떤 작품들을 만나게 될까 마음이 부풀었다. 마침 그날은 ‘이불’ 작가의 전시회 첫날이었다.
미술관에 도착했다. 정문으로 향하니, 오른편 벽면을 가득 채운 영상이 우리를 맞이한다. 초록빛 은행나무에 앉은 새들이 반짝이다가, 잠시 후 일제히 날아오른다. 우리도 저 새들처럼 전시장을 향해 흩어졌다.
나는 ‘이불’ 작가의 전시회부터 발걸음을 옮겼다. 전시장 천장에는 로켓 같은 거대한 조형물이 매달려 있었다. 어둠을 가르고 떠나는 우주선처럼, 낯선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전시장은 두 개 층으로 나뉘어 있었다. 먼저 위층으로 들어서자, 어둠이 고여 있는 굴 같은 공간이 펼쳐졌다. 전구가 비추는 바닥에는 수많은 거울 조각들이 낮게 엎드려 하나의 연못을 이루고 있었다. 그 앞에 서니, 그것들이 무엇을 비추려는지 알 수 없어 한참을 머물렀다. 어쩌면 내 마음 깊은 곳에도 저와 같은 고요한 빛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작은 체험 부스가 있었다. 작품을 만나려면 한 사람당 15분 정도씩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이미 긴 줄이 늘어서 있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고, 다시 찾았을 때는 줄이 더 길어져 있었다. 끝내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 아쉬움은 나중에 다시 올 순간으로 남아 있다. 언젠가 마주할 시간을, 삶이 내게 건네는 또 하나의 약속처럼 품고 싶다.
아래층 입구로 들어섰다. 환히 트인 공간이 한눈에 들어와 전체 전시를 바라보기에 좋았다. 가까이 다가서면, “이 작품은 무엇을 의미할까?” 하고 되묻게 되는 작품들이 많았다. 추상화 앞에서는 오래 머물며 생각하게 된다. 특히 ‘기억’을 주제로 한 그림들이 눈길을 붙든다. 초록, 파랑, 주황, 흰색들이 꼬이고 둥글어지며 하늘로 날아오르려 한다. 선 속에 갇힌 기억들이 숨을 내쉬듯, 작가는 이를 색으로 풀어냈다. 기억에도 색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은 아마 환한 코랄빛으로 남을 것 같다.
어느 한 작품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거대한 철 구조물 위로 넓은 바위가 놓인, 기차 레일 같은 길이 하얀 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음성 안내기를 들으니, 이 작품은 유토피아를 나타낸다고 한다. 쭉 뻗은 레일은 정면에서 보니 한자 ‘사람 인(人)’을 떠올리게 했다. 사람들은 모두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에 우리는 꿈꾸는 걸까, 아니면 현실이 힘겨워 그리워하는 걸까.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유토피아는 아직 손에 닿지 않은 빛. 마음속 저편에서만 아득히 반짝이는 환상이 아닐까.
그날 미술관의 전시는 화려한 색과 빛만이 아니었다. 전시장 한편에는 세월호를 은유한 작품이 자리하고 있었다. 벽을 등진 채 기울어진 배의 끝자락에는 검은 천이 매달려 있다. 배 아래에서 불어나오는 바람에 그 천은 파도처럼 일렁이며 나풀거렸다. 그 앞에서 나는 쉽게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미술이 슬픔을 말할 때, 그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오래 기억을 붙드는 또 하나의 방식이었다. 그 앞에 서 있으니, 유토피아를 향한 희망은 현실의 아픔을 건너야만 비로소 닿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두어 명 보이는 체험 전시가 눈에 들어왔다. 미로를 통과하는 작품이었는데, 안으로 들어서니 거울로 이루어진 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양옆에 나를 비추는 거울 속에서, 출구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한참을 헤매다 나온 뒤에야, 이것이 ‘일상’을 형상화한 작품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우리는 거울처럼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간다. 그 안에 머물다 보면 잠시 출구를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생긴다. 하지만 결국, 어떤 힘든 길에서도 방향을 찾아 나서듯, 우리는 미로 같은 일상을 걸어간다. 반복되는 하루의 거울 속에서도, 가끔은 내가 향하는 곳을 돌아보는 것이 좋겠다.
그 감각을 안고, 나는 다른 전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고미술품과 현대미술 소장품이 전시된 공간이었다. 섬세하게 빚은 고려청자와 까치호랑이 민화는 오랜 세월을 지나도 전하고 싶은 것들을 저마다 이야기하고 있었다. 현대적인 설치 작품들은 서로 대화하듯 놓여 있었다. 시간의 흐름과 인간의 손길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나는 ‘기억’과 ‘꿈’이라는 같은 주제를 다른 결로 다시 만나고 있었다. 오래된 청자가 담은 역사와, ‘이불’ 작가가 펼친 색의 추상이 마주할 때, 현실과 이상, 과거와 현재가 하나의 호흡으로 겹치는 듯했다.
그날 미술관을 나서며, 나는 문득 생각했다. 유토피아는 작품 속에만 존재하는 꿈일까. 아니면 우리의 마음 한쪽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약속일까. 작품과 작품 사이, 색과 질감 사이, 그리고 기억과 사유 사이, 미술관은 닿지 않은 환상을 내 손끝 가까이 살짝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