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옥춘당

『옥춘당』 (고정순 글·그림, 2022)

by 책읽는아이린

‘김순임 씨가 천천히 녹여 먹던 사탕,

제사상에서 가장 예뻤던 사탕, 입안 가득 향기가 퍼지던 사탕’


도서관의 고요한 오후, 책등을 따라 손끝을 미끄러뜨리다 『옥춘당』이라는 제목에 멈추었다. 오래된 사탕의 이름이 이상하게 따뜻했다. 평소 좋아하던 고정순 작가의 이름이 보여 망설임 없이 책을 꺼냈다.


『옥춘당』은 전쟁고아로 만나 평생을 함께한 고자동 씨와 김순임 씨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이다. 두 사람은 결혼해서 삼 남매를 낳고 살아간다.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할아버지와 달리 할머니는 낯을 많이 가렸고, 할아버지가 유일한 친구였다. 할아버지가 질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할머니는 치매를 앓게 된다. 가족들의 보살핌을 받다 요양원으로 간 할머니는 종일 동그라미를 그리며 시간을 보낸다. 그 동그라미들은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아’ 해보라며 넣어주던 옥춘당이다. 그리운 사랑을 되살리는 옥춘당은 할머니에게 남편의 온기이자, 삶을 이어가는 작은 위로였다.


책을 덮고도 한참 동안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아픈 할머니의 쓸쓸한 모습에서 병상에 누운 엄마의 모습이 겹쳐왔다. 할머니가 옥춘당을 그리며 잃은 사랑을 불러내듯, 나도 언젠가부터 사라져가는 엄마를 잊지 않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파킨슨병은 천천히 몸의 문을 닫아간다. 손끝의 미세한 떨림이 하루를 흔들고, 말은 느리게 흩어진다. “밥 먹었니?” 하던 쾌활한 목소리가 이제는 숨을 고르며 한 마디씩 흘러나온다. 엄마의 하루가 조금씩 희미해지는 것 같아 마음에 비가 내리곤 했다. 하지만 병이 깊어질수록 오히려 엄마의 삶이 더 궁금해졌다. ‘엄마는 어떤 소녀였을까. 어떤 꿈을 꾸었을까. 내게 말하지 못한 슬픔은 무엇이었을까.’ 그렇게 나는 엄마의 인생을 단편소설로 옮기기 시작했다.


글을 쓰는 일은 옥춘당에 색을 덧입히는 일과 닮았다. 엄마의 어린 시절을 상상하며 문장을 이어갈 때면, 마치 그 시절의 공기를 마시는 기분이 든다. 시골 마을의 장독대 옆, 흙장난하던 소녀가 훗날 나의 엄마가 된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내가 문장 하나하나로 엄마를 그릴 때, 엄마의 웃음과 눈물, 평생의 희생과 침묵이 글 속에서 반짝인다. 그것은 나의 옥춘당이 된다.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알았다. 엄마의 인생이 허망하게 저물어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수많은 빛으로 내 안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그 빛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내가 글로 남기는 순간 다시 세상으로 번진다.


언젠가 엄마가 나를 잊어도, 내가 쓴 문장은 그 기억을 대신 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엄마의 하루를 기록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의 옥춘당을 하나씩 그려 넣는 일이다. 그 사탕이 다 녹아도 그 맛만은 오래 남듯이. 엄마의 향기는 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