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로 인한 전학, 대입, 취업 등 생활 반경(거주지)과 공부하는 분야(환경)가 달라지면 친구관계에도 변화가 온다. 이전에는 친했던 친구와 관심사가 달라져 소원해지기도 하고 새로운 환경에서 같은 공감대를 가진 새로운 친구와 금방 돈독해지기도 한다.
30살이 되면서 중학교 친구가 벌써 15년 지기가 되기도 하는 걸 보면 서로를 얼마나 오래 알고 지냈는지 놀라기도 하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니. 그렇게 나는 문득 앞으로의 내 인생에서 오래가는 친구는 누구일지 궁금하였다.
어쩌면 앞으로 결혼과 출산, 육아 등의 더 많은 변화가 생길 30대에는 친구관계 또한 가장 큰 변화가 오는 시기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어디선가 10년 지기, 20년 지기 친구와 손절했다는 얘기를 듣고 보면 오래 알고 지낸 시간이 무색하게도 오래가기 힘든 친구는 누구일지도 생각해보았다.
주식처럼 친구관계도 상한가처럼 절친이 되는 시기, 하한가처럼 사이가 멀어지는 시기, 상장폐지처럼 손절을 하며 관계가 끝나는 시점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글을 쓰면서 어떤 친구가 내게 장투처럼 오래갈 친구인지 혹은 내가 친구에게 시간과 정성을 쏟으며 오래갈 만한 친구였는지도 되돌아보게 되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부를 하던 학창 시절과 달리 나이가 들면서 그때와는 서로 다른 환경에 살고 있다. 서로 하는 일도, 만나는 사람의 유형도, 한 달에 버는 돈도 달라지고 그에 따라 관심사, 가치관, 목표도 달라진다. 그래서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오래된 친구와 할 이야기가 과거에 멈춰있다. 서로의 현재를 이해할 수 없는 벽을 마주하는 것이다. 서로를 가장 잘 알고 있던 시절이 시간이 지남, 환경이 달라짐에 따라 멀어진다. 그래서 오래 알고 지내지만 오래 할 만한 이야기가 많지 않다. 결국 만나면 옛날 추억만 도돌이표처럼 얘기한다.
“옛날에 너 이랬던거 기억나?”
“옛날에 누구 기억나?”
그리고 그 추억거리가 고갈되면 대화는 끝이 난다.
[공감]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 또는 그렇게 느끼는 기분
일을 꾸준히 하지 않고 하던 일을 쉽게 그만두고 쉬고 알바하길 반복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한 회사를 4년째 다니던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하지 않는 그 친구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그렇게 한 회사에서 오래 일하니? 지겹지도 않니?"
"글쎄. 너는 지금 일하는 곳에서 받는 대우는 당장 그만둬도 비슷한 대우를 해주는 곳이 많다고 생각해서 그만두는 거 아니야? 나는 지금 힘들다고 그만둬도 이만큼 대우해주는 회사를 가기 어렵다고 생각해서 그만두기 어려운 거야."
그 뒤로 우리는 서로 하는 일에 대해 말할 거리가 없었다. 하루에 삼분의 일을 보내는 직장이라는 일상이 빠지는 순간 우리는 서로 할 이야기도 공감대도 찾기 어려웠다.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가벼운 가십거리 거나 나와 너의 이야기가 아닌 주변 누군가의 이야기로 채워지긴 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친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같은 동네, 같은 중학교, 같은 고등학교에서 시작되었던 우리의 공통점이 다른 대학교, 다른 전공, 다른 직업으로 변화하면서 다른 직장환경, 다른 가치관, 다른 목표, 다른 관심사를 낳았다. 그리고 점차 서로 모르는 사람이 되어갔다.
이렇게 서로 다른 삶을 사는 경우, 단둘이 깊이 있는 대화를 하며 공감할 거리가 많지 않다. 그래서 예전과 같은 돈독함을 유지하기 쉽지 않다. 과거 서로 공감되는 부분이 서로를 가깝게 만들었지만 현재 서로가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 서로를 멀게 만든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친분을 쌓는 데 몇 년, 몇십 년이 걸렸더라도 그 관계가 끊어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내가 10년 알고 지낸 친구와 손절하는데 5개월이 걸렸으니 말이다. 사실 나와 코드가 맞지 않는 사람이라면 오래 알고 지내지도 않았을 텐데도 말이다. 그렇게 서로가 웃음코드이던 대화코드이던 뭐가 맞는다고 생각하여 함께 친분을 쌓았던 친구와 손절하는 건 오만에서 시작된다. 서로 알고 지낸 시간이 있으니 내가 쟤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오만 말이다. 그 오만함은 정말이지 오만 정 떨어지게 만든다.
[오만] 태도나 행동이 건방지거나 거만함, 또는 그 태도나 행동
만나고 나면 불쾌함만 남는 오만한 친구의 말투는 3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가르침형'이다.
"너는 이런 남자가 어울려. 이런 남자를 만나." "너 왜 그렇게 행동했니?"
내 감정과 상황에 공감해주는 친구가 아닌 가르치고 조언하는 선생님에 빙의하여 대화한다. 그 태도 안에는 내가 너보다 현명하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기도 하다. 진짜 훈계하는 선생님과 대화하는 것도 늘 불편한데 친구가 선생님에 빙의되어 대화하는 건 불편함을 넘어 불쾌하다. 그런데 이 '-가르침형'은 친구사이에 서로를 생각해준다는 아름다운 의도 하에 쉽게 일어난다.
그래서 더 주의해야 한다. 나 또한 친구에게 가르치려고 하고 있지 않은지.
두 번째는 '-무례형'이다.
"너 연봉 얼마야? 남자친구 연봉 얼마야?" "너네 집 얼마야?"
나이가 들수록 오래 알고 지냈다고 실례되는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친구들이 점차 불편해진다. 심지어 그들은 이게 실례가 되는 질문이라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막상 본인이 얼마 받는지, 본인 남자친구가 얼마 버는지, 본인 집이 얼마인지를 먼저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갑작스레 무례한 공격을 받은 사람만 불쾌감을 느낄 뿐이다.
그리고 이 무례함은 쉽게 무시로 이어지며 당하는 사람에게는 불쾌함을 넘어 분노를 낳는다.
세 번째는 '-무시형'이다.
"내가 널 아는데 넌 그걸 절대 못해" "야. 니가 그걸 한다고? 어떻게 할 건데?" "너 돈 얼마 있는데?"
'-무시형'은 손절을 고민하는 가장 결정타이다. 친구의 좋은 점은 나를 좋게 여기고 응원해주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나를 하대하고 내 새로운 시작이나 계획을 무시하며 힘 빠지게 만든다면 더 이상 친구로 지낼 이유가 없다. '지금껏 니가 해온 일에 성공이 없는데 그걸 지금 니가 하겠다고? 내가 널 오래 봐서 아는데~' 서로 알고 지낸 시간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자기가 상대를 잘 안다고 오만하게 말한다.
이런 사람은 친구로 둘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나의 자존감을 갉아먹는 사람이니 멀리 두는 게 상책이다.
과거에 아무리 절친했던 친구라도 위의 두 가지 이유가 심화되는 순간 멀어진다. 그리고 그 거리감이 어쩌면 우리를 더 편하게 해주기도 한다.
사실 우리가 친구를 사귀고 만나는 이유는 위로를 받고 즐거움을 느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만나고 나면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 더 나아가 불쾌함과 부글거림만 남기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친구로 만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친한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오만하기 가장 쉽고 오만하게 말하는 친구와 손절하는게 친분을 유지하는 것보다 마음 편하다. 그러니 지금 친한 친구가 오래가는 친구가 아닐 수 있는 것이다. 절친은 아니지만 비슷한 환경에서 꾸준히 연락을 유지하며 서로 필요할 때 적당한 위로를 주고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오래갈 친구가 아닐까.
사랑이 영원할 수 없듯 친분도 영원할 수 없나 보다. 친구사이에는 서로 공감하면서도 오만하지 않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