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일지
최근에 전직장 동료들을 만났다. 3년 전에 나를 괴롭히던 지점장 밑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들인데 그 당시 내게는 큰 힘과 위로를 주었던 분들이었다. 오랜만에 만나 그간의 근황을 나누면서 옛이야기가 나왔다. 3년 전 내 생일날, 그 지점장이 내게 한 악행을 아직도 나는 잊지 못한다며 나는 그녀를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고 말했다. 다른 선배도 그 상황에 내게 감정 이입되어서 여전히 그날의 분위기가 생생히 떠오른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그녀가 한 짓을 다시금 술자리 안주로 삼으며 그녀가 얼마나 쌍년이었는지 말하고 싶었다.
내가 직장에서 괴롭힘을 겪은 일로부터 3년이나 지났고 그녀도 나도 더 이상 그 회사에 다니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의 소식이 들릴 때마다 나는 그녀를 씹고 씹고 또 씹었다. 마음속으로 저주를 퍼붓고 조롱했다. 그녀에 대한 안 좋은 소식이 들려오면 속으로 꼴좋다고 비웃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더 이상 그녀를 만날 일도 없고 연락하지도 않으면서도 그녀에 대한 증오를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증오 속에서 쓸데없는 에너지를 쓰며 지쳐가는 건 언제나 나 자신이었다.
영문도 알지 못한 채 괴롭힘을 당하던 그때, 28살의 나는 온전히 그 괴롭힘을 당해내면서도 도망가지 않았다. 회장도 아니고 사장도 아니고 고작 일개 과장나부랭이의 괴롭힘 때문에 내 일터를, 내 커리어를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괴롭힘에 당당해지고자 더 열심히 일했다. 성과를 내려고 악착같이 일했다. 그녀가 인정하지 않을 성과일지라도 나 스스로 악착같이 일했고 그건 그대로 내 역량이 되었다. 그러니 오히려 그때의 그 괴롭힘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준 셈이다. 그럼에도 그때를 떠올리면, 그녀를 생각하면 증오심이 불타올랐다.
잘 자고 일어나서 아침에 이 닦는데 벌써 머릿속엔 최 팀장 개자식이 들어와 있고 한수진 미친년도 들어와 있고 정찬혁 개새끼도 들어와 있고 그냥 자고 일어났어. 근데 이를 닦는데 화가 나 있어.
[나의 해방일지 - 16회]
그래서 언제나 그녀를 떠올리면 망가져있는 건 내 기분이었다. 여전히 그녀는 알지도 못할 내 감정만 상했다. 이미 지난 일이고, 그녀의 괴롭힘이 내게는 기회가 되어 더 좋은 직무로 이동하는 발판이 되었는데 말이다. 왜 나는 그렇게 과거의 일에, 증오심에 사로잡혀 있을까. 어쩌면 나는 그때 그녀에게 움찔하지도 못한 채 당하고만 있던 그때의 나 자신에 대한 후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언제나 나는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이렇게 어디를 가든 인정받고 있고 너 따위의 시기 질투에 무너질 사람이 아니라고. 너의 옹졸한 마음이 결국 너를 망하게 할 거라고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게 내 안에서 증오를 키워가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알지도 못하는데 나 혼자 미워하고 증오하고 저주하는 건.. 결국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그 새끼는 나한테 돈을 다 갚으면 안 돼. 그 새끼가 얼마나 형편없는 새끼인지 오래오래 증명해 보일 거니깐. 세상에 증명해 보이고 싶어. 내가 별 볼일 없는 인간이라서 그놈이 간 게 아니고 그놈이 형편없는 놈이라서 그 따위로 하고 간 거라고. 결혼식장에 가서도 '넌 형편없는 놈이야'라고 느끼게 하고 싶고 그놈이 애를 낳는다면 돌잔치에 가서도 '넌 형편없는 놈이야'라고 느끼게 하고 싶어. 그래서 내가 힘이 없는 거야. 누군가의 형편없음을 증명하기 위한 존재로 나를 세워 놨으니깐.
[나의 해방일지 - 16회]
그러다 문득 조지 엘리엇이 말한 [인간이 갇히기 쉬운 5가지 감옥]에 대한 글을 보았다. 인간이 스스로 마음속에 감옥을 만들어두는데 그 감옥이 크게 5가지가 있다고 한다.
1. 자기 사랑의 감옥
2. 근심의 감옥
3. 과거에 빠져 있는 회상의 감옥
4. 남의 것만 좋아 보이는 시기, 질투의 감옥
5. 증오의 감옥
인간이 보통 1~2개의 감옥을 스스로 만들어 그 안에 빠진다고 하는데 내가 빠진 감옥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나는 '증오의 감옥'에 빠져 살지 않았나 싶다. 이미 지난 일이고 그때의 괴로움이 내게 기회가 되었음에도 내게 해를 끼친 자들을 증오하느라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썼다. 결국 나를 괴롭힌 증오라는 감옥은 그녀가 만든 게 아니라 내 안에서 내가 만들어두고 스스로를 가둬두었다. 스스로 가둔 증오라는 감옥 속에서 나는 그녀를 수없이 미워하고 혐오하고 증오하면서 무엇을 얻었을까. 무엇을 잃었을까.
그녀를 증오하는 감옥에서 살면서 내가 얻은 건, 누군가를 증오하는 일이 결국 나를 괴롭게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그때의 그녀를 내 마음속에서 용서하기로 했다. 그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말이다. 그녀를 떠올리며 만든 감옥을 내가 박차고 나오려고 한다.
태훈 : 근데 출발은 했는데 뭐가 없지 않아요?
향기 : 근데 아예 없다고는 또 못 하지 않아요?
태훈 : 좀 되셨어요? 해방
향기 : 뭐 어느 날은 좀 된 것 같고 어느 날은 도로 아미타불이지만 그래도 아예 없다고는 못 하는데, 조 과장님은 전혀 없으세요?
태훈 : 나의 힘겨움의 원인을 짚었다는 거 외에는..
미정 : 그게 전부인 거 같아요. 내 문제점을 짚었다는 거
[나의 해방일지 - 16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