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는 게 없을지라도
입사 3년 차, 어리버리하던 막내 사원은 반란군이 되었다. 사실 처음부터 내가 불만 사원은 아니었다. 그 당시만 해도 나는 나의 부족한 역량을 시간으로 때우고자 하는 열정+노예 마인드가 장착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내 상사로 있던 팀장님은 내가 태어난 쯤에 회사에 입사하셨으니 나에게는 굉장히 높아 보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그런 팀장님의 업무지시에 늘 “예썰 충성”을 외쳤고 그가 불편한 심기를 보이면 모든 과실이 오로지 내 탓으로만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철저히 팀장님의 노예로 고분고분하게 양육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름휴가도 반납하고 노예처럼 일하는데 별거 아닌 일에 소리를 지르는 팀장님을 보고 나도 모르게 어린아이처럼 사무실에서 엉엉 울고 말았다. 당황하신 팀장님은 미안하다며 바로 사과를 했지만 노예처럼 부려져도 수고했다는 소리 하나 못 듣고 별거 아닌 일에 감정풀이까지 당한 막내 사원은 울음으로 그 간의 설움을 쏟아내었다. 하늘 같은 팀장님의 독재로 받은 정신적 상처와 육체적 고됨이 곪아 터진 것이다. 입을 틀어막아도 멈추지 않는 울음에 나는 난생처음 회사에서 30분 넘게 오열을 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달라졌다. 팀장님 몫의 서류 작업까지 하며 야근과 주말출근까지 하는 불합리함을 참지 않기로 하였다. 그리고 더 이상 그의 감정풀이 대상이 되지 않기로 하였다. 집에서도 귀한 자식이고 회사도 내 실력으로 들어왔는데 월급 주는 사장도 아닌 고작 상사에 움츠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일은 내가 다 하고 있는데 나랑 사이가 틀어지면 과연 누가 손해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으니 무서울 것도 없었다. 노예에서 자유시민으로 정신 차려 보니 나보다 높은 직급과 연차도 별거 아니었다. 더럽고 치사해서 퇴사하거나 다른 곳으로 이직하면 안 볼 사람이 아닌가. 내가 여길 나가더라도 그냥 나가지 않겠다. 그간 내가 받은 불합리한 모든 것을 고발하리라는 생각으로 더 당당하게 나갔다.
그 후 나는 눈치 보며 퇴근도 못하고 강제 야근을 하던 지난날과 달리 "팀장님 제가 집이 멀어서 이만 퇴근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하며 팀장님이 퇴근하기 전에 당당히 정시퇴근을 했다. 위계질서를 강하게 세운 팀장님의 왕국에서 당당히 먼저 정시 퇴근하는 나를 보며 팀장님도 속으로 고까워했을 터이다. 당당해진 나를 보며 팀장님은 내게 말을 전할 만한 옆 팀 선배에게 내 뒷담?을 하셔서 팀장님의 불만이 내 귀에도 자주 들어오곤 했으니 말이다. 그러다 결국 그는 내게 "너 일하기 싫으냐? 너 회사 다니기 싫어?"라고 쏘아붙였다. 팀장님의 그 말은 우리의 갈등을 표면화시켰다.
거기에서 나는 "아니요 팀장님. 제가 부서의 모든 업무를 맡아 일하니 너무 벅찹니다." 조용하지만 당당하게 말했다. 그렇게 사무실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팀장님은 "네 말은 내가 일을 안 한다는 소리로 들린다? 알겠다. 니 맘대로 해"
라고 날카롭게 말하시며 갈등을 해결되지 않은 채 대화가 끝났다. 그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내가 알고 다른 동료들이 알고 심지어 팀장님 본인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나의 첫 불만 표출에 팀장님 본인은 인정하지 않는 듯이 내게 되물었다. 이때 나는 인정하지 않는 그의 태도를 보며 앞으로도 굴하지 않고 강하게 나갈 것을 다짐했다.
실무의 모든 것을 맡은 나와 소통이 단절되면 손발이 잘린 팀장님이 업무적으로 더 답답할 테니 나야 뭐 불편할 것도 없다는 당당함이었다. 내 일은 팀장님의 도움 없이도 여태껏 내가 잘 해내고 있었고 실무자인 내 도움 없이는 팀장님이 불편하니 결국 갈등으로 피해볼 사람은 팀장님이었다. 더군다나 자신의 팀원과의 트러블은 나보다 ‘아랫사람 관리 못하는’ 팀장님 평판의 흠이 될 거라는 잃은 거 없는 막내 사원의 패기였다.
결국 한 달간의 냉전 끝에 그는 "너 불만이 뭐야?" 하면서 나에게 대화를 시도하였다. 그의 질문에 나도 솔직하게 "통근시간도 긴데 혼자 일을 다 맡아 야근과 주말근무까지 하니 체력적으로 힘이 듭니다."라고 하니 그제야 그도 "알겠다. 그럼 내가 뭘 도와줄까?"라고 말하며 갈등은 극적으로 끝이 났다.
사실 그는 사내에서 유명한 독불장군이면서도 고참 중에 고참 팀장으로 자기 밑에 오는 담당들을 부려먹기로 유명했다. 그러니 웬만한 대리들도 찍도 못서고 그가 시키는 일이라면 불합리하다 느껴도 따르는 게 암묵적 룰이었다. 그렇게 그 팀장님은 몇십 년을 자기 부서의 왕으로 군림하였던 분이셨기에 아주 작은 막내 사원의 반란이 같잖게 느껴졌을 것이다. 비록 그가 내 요청에 "알겠다."라고 말했지만 얼마 안가 팀장님은 원래 스타일대로 돌아왔고 나는 다시 모든 일을 떠안아야만 했다. 그리고 내가 발령이 나서 떠난 후 그 팀장님은 여전히 주임 대리급에게 일을 던지고 아무것도 안 하신다는 말이 들리기도 했다. 결국 내 반란은 그를 변화시키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입사 후 가장 잘한 일은 그 팀장님의 독재에 정면으로 들이박은 것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팀장님은 변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반란을 일으킨 후 내 속에 오열할 만큼 응어리를 담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내게 진정 필요했던 건 팀장님이 본인의 독재를 인정하고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상황이 바뀌지 않았더라도 그가 인정하고 수긍하는 모습을 보았으니 아예 실패한 반란도 아니었다.
그 당시 내 의견은 '말 같지도 않은 말'이라고 무시하고 나를 노예처럼 부리는 팀장님이 세상에서 제일 미웠고 증오하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 증오로 가장 힘든 사람은 미워하는 사람과 일해야 하는 나 자신이었다. 그러나 반란 이후 적어도 내가 독재자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할 수 있는 응징을 다했으니 미움과 증오가 사라졌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만큼 고통스럽고 힘든 일은 없다. 상대는 내 고통을 모르는데 나 혼자 뒤에서 이를 갈고 눈물을 훔쳐야 하는 게 얼마나 억울하고 분한 일인지 모른다. 그런데 그 분노를 대상자에게 표출하여 상대도 내가 고통받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순간 증오를 사그라든다. 그리고 그렇게 내 감정을 표출해야 상대의 감정과 상황을 이해하고 용서할 여유도 생긴다.
그러니 부당하게 대우받고 있다면 당당히 들이박자.
설사 내가 뭔가 잃게 된다고 해도 적어도 참는 것보다 후회 없는 선택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