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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곰 Mar 07. 2020

여유가 없는 사회에서 여유를 갖기.

지난해 사무실을 리뉴얼을 하고 화장실에 온수가 나오지 않기 시작했다. 몇 차례 다른 동료들이 시설을 책임지는 실장님에게 '화장실 온수'요청을 드렸으나 8개월째 여전히 온수는 나오지 않고 있다. 코로나로 손 씻기가 중요한 이 시국에 찬물로 매번 손을 씻을 때마다 얼마나 손이 시린 줄 모른다. 손 씻을 때뿐만 아니라 양치할 때는 더하다. 그렇다고 사무실 바로 앞 화장실을 두고 건물 반대쪽 혹은 다른 층까지 화장실을 이용하기는 번거로웠다. 화장실 '온수기' 설치가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의구심도 들었다. 참다 참다 몇 차례 '온수'를 요청드려도 묵묵부답인 실장님께 엊그제 카톡을 보내고 말았다.



실장님 저희 4층 화장실 온수가 작년부터 지금까지도 안 나오는데 온수 나올 수 있게 할 수 없을까요??

온수기 설치가 안됨

반대편 사용해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있을까요? 다른 부서들도 문의합니다.

내가 다른 팀 팀장님한테 얘기할게

조회시간에 전달되게

네 저희도 알고 싶은데 온수기 설치 안 되는 이유 저한테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 연차인데

다 설명해 줘야 하나?

연차 신지 몰랐는데 죄송합니다. 꽤 오랫동안 문의드린 걸로 아는데 피드백이 없어서요. 출근하셔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온수기 설치가 안됨. 다른 쪽 사용해."라는 첫마디부터 기분이 상했다. 상황에 대한 양해나 건의사항에 대한 존중은 없이 통보와 명령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서로 불쾌함을 남기는 카톡만 남았다. 하루 종일 실장과의 카톡을 곱씹으며 그의 말투만 탓했다.



그러나 사실 나도 평소 실장의 일처리에 불만이 있었고 은연중에 "지금까지도", "꽤 오랫동안 문의드린 걸로 아는데"라는 말로 그 생각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도 알게 모르게 내 생각을 느꼈을 것이고 우리는 각자의 입장차를 이해하지 못한 채 날카롭게 대화한 것이다.



그렇게 그날 갈등에 대해 속으로 그의 말투를 탓하며 몰려드는 일을 부랴부랴 처리하고 간신히 퇴근을 하였다. 그렇게 퇴근을 하며 3일 전에 주문한 업무상 필요한 부자재가 오지 않아 배송추적을 해보았다. 아직 받지 않은 상품이 ‘배달완료'로 떠있었다. 운송장에 뜬 기사님께 전화를 하니 전화가 바로 끊겼다. 택배기사님들은 보통 전화보다 문자가 편하실 듯하여 바로 문자를 하려 했고 마침 기사님도 문자를 주셨다.



문자 메시지를 보내주세요.

(송장번호가 있는 이미지) 상품 배달  받았는데 배달완료로 뜹니다.

송장번호 부탁드립니다.

(송장번호 이미지 재전달)

아 그거요 조금 전에 연락받아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추적해보니깐 옆 건물로 들어갔더라고요. 내일 제가 찾아서 드리기로 했습니다.

네 박스 2개라서 00 건물 4층 사무실로 요청드리겠습니다. :) 고생하십쇼

예 그러겠습니다.

귀가 안 좋아 문자 부탁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내일 옆 건물에서 회수하여 배송해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



급하게 필요해서 주문했던 상품이었지만 평소 온라인 업무를 하면서 고객님들이 '언제 배달 오는지?' 문의가 많았기에 택배기사님들의 고단하실 상황도 이해가 되었다. 평소보다 급증한 물량과 익일 수령에 익숙해지신 고객들의 문의에 고단하실 거란 생각 들어 한 발짝 물러나 여유 있게 말했다. 그러니 기사님도 자신의 상황을 말하며 양해를 구했다. 아차 싶었다. 상대의 상황도 제대로 모르고 내 입장만 생각하고 재촉하면 어쩔 뻔하였나.



그리고 오전에 실장님과 한 카톡이 대조되어 떠올랐다. 어쩌면 나는 실장의 상황에 대해서는 여유를 갖지 않고 몰아세웠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가 회사에서 친구사이에 혹은 가족끼리 기분 상하는 대화를 나누는 건 서로의 입장을 바꿔 생각하기 전에 내 상황만 재촉하고 몰아세워 생기는 일일지도 모른다.



불편하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사실은 진심을 담은 한마디면 쉽게 끝날 문제인데 말이다. 한치의 양보가 없이 대화하다보면 각자의 입장 속에서 별거 아닌 일임에도 감정적 갈등을 낳기도 한다. 먼저 사과하고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여유 그리고 내가 미쳐 알지 못하는 상대의 상황을 재촉하지 않는 여유는 이 야박한 시대에 가장 필요한 덕목일지도 모른다. 그날 택배기사님과의 문자를 보며 내 입장에서 나만 옳다고 생각하고 행동했던 지난 태도를 반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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