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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ter Kim Nov 09. 2018

그리스인조르바를 읽고, 자유를 생각하다.

자유란 무엇인가?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열린책들


책 초반부에 조르바와 화자(주인공)가 처음 만났을 때,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두 사람의 겉모습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자유는 서로 달랐다. 조르바는 보이는 것, 육체와 물질, 행동에서 자유를 찾았고, 화자는 보이지 않는 것, 영혼과 정신, 사색에서 끊임 없이 자유를 찾아 헤맸다.  


조르바는 자유를 원하는 자만이 인간이라고 말할 정도로, 삶에 있어 자유를 중시했다. 물론 행동으로서의 자유, 물질과 육체로서의 자유이다. 그는 보이지 않는 세계, 사상과 사유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 것은 개나 줘버리라는 말을 하곤 했다. 조르바에겐 하나님이나 악마나 다를게 없다. (두목, 말해 드릴까요? 나는 악마나 하느님이 그게 그거라고 생각해요) 조르바의 삶은 그의 말 만큼이나 거침없었다. 그러나 그런 조르바에게도 한 가지 겁이 나는게 있는데, 그건 바로 나이를 먹는 것이다. (나이를 먹어가는걸 인정한다는 것은 여간 창피한 노릇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걸 눈치채지 못하도록 별짓을 다하는 거죠) 육체와 행동을 중시하는 조르바에게 어쩌면 육체의 쇠약이 겁이나는게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조르바가 두목이라고 부르는 화자에게 삶이란 끊임 없이 진리를 찾아 탐구하고 배우며 발견하고 완성하려는 그 무엇이다. 이 진리를 발견하면 자유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와중에 조르바를 만나고 조르바의 거침 없는 행동에 조금씩 물이 든다. (나는 조르바라는 사내가 부러웠다. 그는 살과 피로 싸우고 죽이고 입을 맞추면서 내가 펜과 잉크로 배우려던 것들을 고스란히 살아온 것이었다. 내가 고독속에서 의자에 눌어붙어 풀어 보려고 하던 문제를 이 사나이는 칼 한 자루로 산속의 맑은 대기를 마시며 풀어 버린 것이었다)  

화자는 조르바의 끊임 없는 권유에도 과부와의 결합을 거부하다 결국 그 끌림을 따라 과부를 찾아가 (아마도 처음 이었을) 육체적 결합을 맺는다. 이 결합으로 화자는 줄기차에 써오던 붓다의 원고를 완성했다. 그로써 끝이었다. (나는 황급히, 언어와 언어의 도액하는 능력의 도움을 빌려 붓다의 몸과 마음과 정신을 유린하였다. 나는 마지막 구절을 원고에다 서슴없이 휘갈기고 한 소리를 지르고 나서 붉은 연필로 내 이름을 큼지막하게 썼다. 그로서 끝이었다.) 과부와의 육체적 결합으로 그는 자신이 끊임없이 탐구하고 갈망하던 영혼의 자유와 육체의 자유를 결합시켰다. 비로소 자유가 완성 된 것이다.  

글의 말미에 화자는 돈, 사람, 고가선, 수레를 모두 잃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잃고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뜻 밖의 해방감을 맛보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외적으로는 참패했지만, 내적으로는 승리를 느낀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살아온 삶(끊임 없이 정신과 영혼을 탐구해오던)이 부질 없는 삶은 아니었음을 느끼며 행복해 한 건 아닐까?  


이미 조르바를 통해 자유를 완성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생전 묘비명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p.s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다른 책들을 더 읽어보고 싶은 이유가 생겼다. 정말 그는 자유를 얻었을까? 책 내용 마지막 부분에서도 조르바가 귀한 녹암을 발견했다고 보러 오라고 할때도, 현실적인 문제로 가지 못했던 그가 아니던가... 혹시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어떤 이유로든 그의 다른 책을 더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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