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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성호 Dec 12. 2017

책, 소란

박연준 시인의 감성 산문집

“좋은 시를 읽을때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몸 가장 낮은 곳에 침전해 있던 비밀 하나가 스웨터에서 올이 풀리듯 스르르 풀어져, 오롯이 드러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럴 때면 무언가 시 비슷한 것이 쓰고 싶어진다. 시를 읽다 시를 쓰고 싶어지는 상태. 이건 뭘까?” ㅡ《소란 본문中》

책을 읽으며 나 역시 많은 글을 써내려갔다. 책과 전혀 무관한 내용이었지만 왜인지 작가의 말처럼 좋은 글을 읽고 있으니 한시라도 빨리 내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피어오르곤 했다. 책 [소란]은 쉽게 물 흐르듯 펼칠만한 책은 아니다. 시인의 비유와 표현이 읽는 자의 눈걸음을 멈칫멈칫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책의 80%이상을 오고가는 기차 내에서 읽었다. 이른 아침 열차, 늦은 저녁 열차를 타고 내려온 덕에 전동차는 조용했고, 덕분에 책을 집중해서 읽어나갈 수 있었다.

201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박연준 시인. 그의 시를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이번 산문집을 통해 그의 문체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의 문체는 피어나는 꽃처럼 향기로웠지만, 때론 사실적이면서 과감했다. 글을 읽어나가며 너무나 적나라한 성적표현에 내 얼굴이 붉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백지는 시작하는 사람들의 거울이다. 어떤 표정을 짓느냐에 따라 ‘글자’라는 발자국이 찍힌다.” ㅡ《소란 본문中》

시인이 말한 시작은 두 가지 의미였다. 새로움을 시작한다는 뜻과, 새로운 시를 집필한다는 시작으로. 글이란 것이 그러하다. 백지에 어떤 기억의 표정들을 찍어낸다. 웃음을 지었던 기억, 울음을 터뜨렸던 기억, 뒷골이 서늘했던 옛 기억 등을 백지에 조금씩 찍어낸다. 시인의 표현대로 ‘포로로 잡혀온 손 목 두 개로’.

시인의 책을 읽을 때면 몽상의 능력이 필요하다. 글을 읽어나감과 동시에 머릿속으로는 그 글을 영상으로 띄워 형상화하고 꾸미는 공정이 요구된다. 그래서 서두에 말한 것과 같이 시인의 글들은 언제나 읽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해당 공정을 끝마쳐 글이 비로소 입체가 되었을 때 그 감동은 더 크게 밀려온다. 마치 이번 책처럼.


“이십대는 감정 과잉과 열망이 엉킨 소란한 시기다. 많은 젊은이들에게 슬픔은 죽음과 맞닿은 듯한 슬픔이며, 걱정과 불안이 고약하게 활개를 치는 시기이다. 고래떼 같은 격정이 몰려오거나 침대를 휘감고 사라지는 파도 앞에서 젊은이들은 슬픔의 먹이가 되는 일이 많을 것이다.”ㅡ《소란 본문中》

서른의 사랑은 조심스럽다. 라는 말을 종종 듣곤 한다. 꼭 사랑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칼과 방패를 쥐고서 무작정 적장으로 뛰어들던 이십대의 열정과 달리, 서른 마흔의 열정은 조금은 조심스럽다. 비슷한 칼과 방패를 쥐곤 있지만, 등 뒤에 크나 큰 군장 하나를 메고 있기 때문이다. 때론 마차를 끄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서른의 열정은 나아갈 것이다. 조심스러울 뿐, 제자리에 서있는 건 아닐 것이니.



PS. 번외의 이야기.
이번 책에서 접한 활자들은 꽤 만족스럽다. 좋은 표현들을 많이 배웠고, 빠져들었기에 나름의 좋은 시간을 이 책과 함께 보내었다. 그러나 디자인적인 면에선 큰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내지(페이지)의 두께가 얇았어야 했다. 가로 길이가 짧은 책은 한 페이지의 두께를 100g미만으로 떨어뜨려야 한다. 반면 이 책은 둔탁할 정도의 두꺼운 종이를 사용했고 그 탓에 책이 제대로 펼쳐지지 않았다. 그리고 책 후반부에는 사진이 글과 함께 첨부되곤 했는데, 이 부분 역시 초중반까지 첨부되지 않던 사진이 끝부분이 돼서야 첨부된 점이 다소 의아했다. 만약 책이 리뉴얼된다면 디자인 부문을 보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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