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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수 Mar 16. 2023

베토벤의 자이가르닉 효과

공연읽기: 뮤지컬 베토벤(Beethoven Secret)

클래식 음악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던 베토벤에 대해서 알려진 사실은 많았지만 사후에 발견된 편지 이슈만큼 관심을 끈 일도 없을 것이다. 그 이슈는 영화로 제작되어 국내에서 ‘불멸의 연인’이란 제목으로 1995년에 개봉했다. 영화는 불멸의 연인이 누구인지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베토벤의 사랑을 묘사했다. 반면, 본 공연은 영화와 다른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그의 편지 속 여인이 다른 인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사랑이야기와 헤어진 이유에 대한 해석도 달랐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기에 그에게 불멸의 연인으로 기억되는 여인에 대한 관심은 수많은 추측과 사연을 만들었다. 그중에서 본 작품은 ‘안토니 브렌타노’라는 여성을 불멸의 연인으로 가정했다. 그 이유로 몇 가지를 짚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편지가 작성된 시기를 날짜와 워터 마크로 분석한 결과였다. 그 분석으로 장소까지 파악하여 추정 인물의 범위를 좁혔다. 1812년 여름 칼스바트에서 베토벤을 만날 수 있었던 여인은 한 명이었다.

둘째, 그녀가 베토벤에게 첫눈에 반해서 사랑을 고백했다는 일화가 있었다. 베토벤은 빈에서 안토니의 가족과 친분을 갖고 잦은 교류를 가졌다. 건강이 약한 안토니를 위해 베토벤이 피아노 연주로 위로를 했었다. 두 사람 사이에 감정이 발전할 시간과 계기가 있었다.

셋째, 베토벤의 연가곡, ‘멀리 있는 연인에게’는 기타로 반주할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이다. 불멸의 연인으로 거론된 인물 중, 안토니가 유일하게 기타를 칠 수 있었다. 본 작품에도 아이들과 기타 치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넷째, 그가 소나타 30번을 안토니의 딸에게 헌정했으며, 그녀에게도 ‘디아벨리 변주곡(Diabelli Variations)’을 헌정했다.  

본 작품은 1810년~1812년, 베토벤의 최정점 시기를 배경으로 했다. 1812년은 불멸의 편지가 작성된 해였다. 그 무렵 베토벤은 청력 장애가 매우 심해지고 있었다. 연주자이자 작곡가였던 사람에게 청각 손실이 어떤 의미인지, 그 고통과 고뇌가 어느 정도인지 미루어 짐작하기는 어렵다. 다만 청각 손실의 고통 속에서 그가 사랑에 빠지는 일은 어쩌면 당연할 수 있다고 판단된다. 사랑만큼 커다란 위안은 없을 테니 말이다.

무대를 반쯤 가린, 검은색 투명 커튼 위로 붉게 쓰인 이름 Beethoven. 검정과 빨강은 그를 상징하는 두 가지 색상이었다. 검정은 작곡가이자 연주자인 베토벤이 청각을 잃고 소리 없는 세상에 살았던 사실을 상징했고, 빨강은 음악에 대한 열정과 불멸의 연인에 대한 사랑을 의미했다.

우측 상단으로 비스듬히 쓰인 그의 이름은 베토벤이란 인물을 엿볼 수 있게 했다. 열정적인 힘은 글자의 두께에서, 신중한 창작은 꾹꾹 눌러쓴 필체에서 느껴졌다. 이름을 쓰면서 자연스러운 손동작이 우상향으로 글자를 끌고 가, 반듯하기보다 격정적인 인상을 주었다. 무대 막 커튼 하나만으로 이 작품이 추구하고자 하는 내용이 절묘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직관적으로 베토벤과 본 공연을 미루어 짐작하고 기대감을 갖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무대의 투명 커튼 안쪽에는 검은색 그랜드 피아노가 자리 잡고 있었다. 무대 한가운데 서있는 주인공처럼, 말없는 존재감을 드러냈다. 안개가 깔린 무대에 엷은 빛이 들어와 피아노의 검정 몸체와 다리를 비추고 있었다. 피아노가 좀 더 입체적이고 살아있는 존재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피아노가 중요한 악기임을 암시하는 만큼, 이번 작품에 사용된 음악들은 베토벤의 피아노 작품들이 많았다. 대중들에게 친숙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14번 ‘월광’, 23번 ‘열정’의 악장들을 들을 수 있었다. ‘엘리제를 위하여’와 ‘미뉴엣’도 주인공들의 심정을 그려주는 가사와 함께 등장했다.

뿐만 아니라 베토벤의 교향곡들도 주요한 테마로 사용되었다. 특히 남녀 주인공의 운명 같은 사랑을 노래한 곡들은 교향곡 5번 ‘운명’을 멜로디로 사용했다. 3시간에 가까운 공연 시간은 베토벤의 명곡들로 가득했기에 깊이 있고 풍부한 감흥을 안겨주었다. 베토벤과 그의 곁에 있던 소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친숙한 음악에 실어 전해주고 있어 숨죽여 몰입할 수 있었다.

베토벤의 음악에 가사를 붙여 노래로 부른 것은 본 작품이 처음은 아니었다. 1982년 영국 오페라 가수 루이스 터커(Louise Tucker)가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을 팝으로 편곡하고 가사를 붙여 불렀다. 그녀의 미드나잇 블루(Midnight Blue)는 국내 라디오 방송에서도 자주 소개되었다. 개인적으로 그 노래가 베토벤이란 작곡가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갖게 된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

본 공연의 무대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 보여주는 화려하며 환상을 자극하는 모션이 있는 무대장치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본 작품이 클래식 선율을 다루며 음악가 내면의 복잡한 감정을 표현해야 했기에, 그에 최적화된 방법을 선택한 것으로 보였다.

모션 장치보다는 빛과 그림자, 그리고 미디어 아트(media art)적 영상 연출 등으로 등장인물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집중했다. 맑은 하늘, 구름의 이동, 저녁노을, 보름달밤, 비 오는 풍경, 천둥과 번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간, 계절, 날씨를 구현했다. 무대 디자인은 운명적인 사랑을 느끼거나, 청각의 고통, 거부하기 힘든 사랑 등 뮤지컬의 극적인 효과를 만들어내는데 충분했다. 고정된 배경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조금씩 바뀌는 배경이 현실감을 더해 주었기 때문이다.

베토벤 캐스팅에 박효신, 안토니 캐스팅에 조정은 공연을 선택해서 관람했다. 박효신의 깊은 음성은 한을 품고 있던 베토벤의 삶과 감정에 적합했다고 생각했다. 베토벤이란 인물이 노래를 잘 부를 것 같지는 않았지만, 박효신의 목소리는 베토벤이란 인물의 내적 모습을 들려주기에 충분했다고 본다. 그는 노래뿐 아니라, 무대 위의 뮤지컬 배우로서 베토벤이란 인물을 표현했다.

특히 그의 걸음걸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연기였다. 어딘지 모를 자신만의 세계 속에 살고 있던 인물의 고독한 걸음걸이었다. 박효신의 가창력과 연기력이 돋보였던 장면은 ‘너의 운명’을 부르는 장면이었다. 긴 호흡으로 뿜어낸 감정으로 관객들은 매료되어 큰 박수를 보냈다.

안토니 역을 맡은 조정은의 음색은 너무도 감미로웠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엄마, 베토벤을 사랑하는 연인으로 손색없는 목소리였기에 몰입도를 높여주었다. 그녀의 힘들이지 않고 편하게 부르는 노래는 가사와 감정 전달까지 좋았다.

그녀는 자유로운 의식을 지니고 불의를 보고 지나치지 않는 강인한 성품부터 연인과 아이들 앞에서 한 없이 부드러운 인품까지 연기했다. 안토니라는 여인이 있다면 조정은 배우가 보여준 모습과 일치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녀의 노래가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프라하의 카를교에서 '매직 문’을 부르는 장면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사랑에 빠져, 한 없이 베토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월광 소나타의 선율로 전해졌다.

본 공연은 커튼콜 이후에도 앙코르처럼 진행되는 엔딩씬마저 아름다웠다. 모든 관객들이 일어서서 박수를 치며 환호를 보냈다. 공연이 끝나도 끝이 아닌 듯한 퍼포먼스를 뜻밖에 보게 되어, 공연이 끝나는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베토벤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기에, 그의 마음에서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 흔적이 편지로 남겨져 있었기에, 후대 사람들은 그를 더욱 사랑하고 잊을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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