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정이
영화 ‘정이’는 미래 사회의 단면을 밀도 있게 표현하여, 현대인에게 인간이란 무엇인지 자문하게 만들었다. 인간이란 기억에 저장된 정보로 스스로 누구인지 판단하는 존재이다. 그 정보의 연속성은 그 존재를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도록 만든다. 일란성쌍둥이라도 각자의 경험과 사유를 통해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영화는 인간관의 문제 제기를 복제기술에서 시작했다. 복제 기술은 발터 벤야민이 오래전에 제기했던 주제였다. 복제기술의 발달이 예술의 원작이 갖는 분위기와 유일성이란 아우라를 붕괴시킨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문화와 예술의 대중성이 가능해졌다고 주장했다. 감독은 이 주제를 미디어와 콘텐츠의 영역을 넘어 인간의 영역까지 끌고 들어왔다. 사진과 이미지의 복제처럼, 인간의 두뇌도 복제가 가능하다는 설정이었다.
두뇌 복제 기술은 인간의 지적 능력이 복제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투 능력이 뛰어났던 ‘정이’의 두뇌를 복제하여 휴머노이드에 장착하면, 우수한 전투 로봇을 만드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미시적 관점에서 본다면, 특정 능력의 복제가 지닌 가치는 거대한 사업 기회임에 분명했다.
문제는 두뇌의 일부가 아닌, 전체가 복제되는 데 있었다. 개인의 정체성까지도 복제가 되었다. 이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는, 탈인간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복제된 두뇌가 장착된 휴머노이드는 탈인간화된 존재였다.
감독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복제된 두뇌를 지닌 존재에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복제 가능한 존재는 인간이 아니며, 인간을 닮은 형상을 하고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유일성이란 가장 중요한 점을 지적했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질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휴머노이드가 더 이상 복제할 수 없는 존재가 되면, 어떻게 되는가? 인간과 유사한 조건, 유일성을 충족하므로 우리의 태도는 달라질 수 있을까? 감독은 여지를 남겨놓았지만,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치 인간처럼 대해야 한다고 말이다.
‘정이’의 딸이자 두뇌 복제 연구팀장을 맡은 강수연의 선택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복제기술로 탈인간화되어 있는 엄마의 휴머노이드들을 실험하면서 그녀가 선택한 길은 인간의 복원이었다. 비록 인간의 두뇌를 가지고 있어도, 복제되는 존재는 인간이 아니었다. 의외로 복원의 방법은 간단했다. 원본, 오리지널은 하나만 있어야 하며, 그렇게 만들면 되는 것이었다.
이 영화가 매력적인 또 하나의 이유는 연상호 감독이 만든 SF 영화란 사실이었다. 그는 전작들에서 사실감 있는 액션을 보여주었다. 부산행의 좀비, 지옥의 저승사자 등의 움직임은 상상력을 충분히 자극시켜 줄 만큼 임팩트가 있었다.
정이에서도 로봇의 전투액션, 움직임과 속도감 등은 영화의 긴장감을 더했고, 화면의 공간 속으로 몰입하게 만들었다. 주인공의 능력이 극대화되기 위해서는 맞수의 능력이 그에 상응할 만큼 뛰어나고 관객을 압도해야 했다.
연감독이 표현했던 작품의 좀비, 저승사자, 귀신 등은 실존하지 않는다. 동물형 전투 로봇도 마찬가지이다. 가까운 미래에 구현이 가능할 수 있어도 아직은 실존하지 않는다.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는 불안감과 호기심을 동시에 갖게 만든다. 그는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두려울 수 있는 대상을 영화의 소재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관심사는 일맥상통하고 있었다. 관객들에게 관심을 끌어내는 공식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미 여러 차례 성공을 했고 여전히 유효했다.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은 배우였다. 우선 고 강수연 배우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한국적 정서로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배우는 미래 사회에서 한국적인 정서를 지닌 존재로 활약할 수 있었다.
그녀가 맡은 역할은 모녀간의 사랑과 기억을 간직한 상처 입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상처가 멈추지 않은 채, 그녀의 생을 좀먹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그것을 스스로 치유하는 법을 찾았다.
마지막으로 김현주 배우의 재발견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었다. 그녀는 과거 드라마를 통해 발랄한 청춘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근래 들어 변호사와 같은 전문직 인물을 자연스럽게 소화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40대가 접어 들어서 액션에 도전을 했다.
그녀의 액션 가능성은 이미 연감독과 함께 작업을 했던 전작 ‘지옥’에서 엿볼 수 있었다. 불의에 맞서 싸우는 여전사다운 면모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재능은 연상호 감독의 연출을 통해서 더욱 빛이 났다. 배우 김현주는 영화 속에서 한 아이의 엄마이고, 전투를 잘하는 전투형 휴머노이드에서 가정용 휴머노이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력을 보여주기에 적합했다. 그녀의 도전과 매력이 작품을 더욱 돋보이는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