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본 없는 삶, 그 막이 오를 때
삶은 급작스럽게 잔인한 농담을 던지기도 합니다. "각본 없음"의 저자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엮어 사람들을 웃고 울리는 각본가입니다. 에미상을 수상하고, 영화 "철의 여인"과 같은 명작으로 세상의 찬사를 받던 아비 모건. 그녀는 인물의 감정선을 조율하고, 갈등을 배치하며, 기어코 희망적인 결말을 향해 서사를 이끌어가는 전문가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삶에 예고 없이 3막이 시작되었습니다. 각본도, 연출도, 심지어 주연 배우의 대사조차 없는, 지독히 현실적인 무대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18년을 함께한 동반자 제이콥이 쓰러집니다. 원인 모를 병은 그의 뇌를 공격했고,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그는 더 이상 아비 모건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나는 당신이 누군지 몰라요.' 이 짧은 문장은 그녀가 쌓아 올린 세계의 근간을 뒤흔듭니다. 사랑, 기억, 관계. 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물음표가 됩니다. 책의 원제 '이것은 동정심을 유발하는 회고록이 아니다(This is Not a Pity Memoir)'는 이 책의 성격을 명확히 규정합니다. 이것은 눈물을 강요하는 신파가 아닙니다. 삶의 통제권을 완전히 상실한 한 인간이, 무대 위에서 어떻게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기 위해 분투하는 생생한 기록입니다.
제이콥이 기억을 잃자, 그와 저자의 관계는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아니, 원점 이하로 추락합니다. 제이콥은 저자를 그저 '아비 모건'이라는 이름의 타인으로 대합니다. 18년의 세월, 두 아이, 함께 나눈 웃음과 다툼의 역사가 공중으로 흩어집니다. 작가는 여기서 집요하게 묻습니다. 기억이 사라진다면, 사랑도 사라지는가? 한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하던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우리는 여전히 그를 사랑할 수 있는가?
저자는 감상적인 자기 연민에 빠지는 대신, 상황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관찰합니다.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찍듯, 변해버린 반려자의 모습과 그를 돌보는 자신, 그리고 혼란스러워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건조하게 응시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다층적인 의미를 지니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단순히 뜨거운 감정이나 낭만적 서사에 머물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때로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18년 만에 결혼을 결심하게 만드는 실용적인 선택이 되기도 하고,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상대를 향해 매일 "사랑해"라고 속삭이는 행위를 통해 겨우 유지가 되기도 합니다.
저자는 자신의 전문 분야인 '글쓰기'를 통해 이 재난을 통과합니다. 각본을 쓸 수 없는 현실을, 역설적으로 한 편의 글로 써 내려가며 스스로를 구원합니다. 이 글쓰기는 상처를 전시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삶의 조각들을 그러모아 어떻게든 의미를 찾아내려는 필사적인 투쟁에 가깝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자신마저 유방암 진단을 받는 절망의 한복판에서, 그녀는 유머를 잃지 않습니다. 병원 복도에서 벌어지는 소동, 의료진과의 엉뚱한 대화 속에서 웃음을 찾아냅니다. 그 웃음은 현실을 이겨내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독자들에게 전하는 위로입니다.
이 책은 해피엔딩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제이콥의 상태가 극적으로 호전되거나, 모든 문제가 마법처럼 해결되지 않습니다. 저자가 발견한 것은 그런 종류의 판타지가 아닙니다. 그녀는 '불완전한 행복'이야말로 우리가 붙잡아야 할 삶의 본질임을 깨닫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폐허 위에서도 삶은 계속되고, 우리는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야 합니다.
이 책의 정직함 때문에, 읽는 동안 몇 차례나 책을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작가가 겪는 고통의 총량이 너무나 거대해서, 그 무게에 짓눌릴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슬픔을 미화하거나 포장하지 않고 날것 그대로를 드러냅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지만, 동시에 독자에게 상당한 감정적 에너지를 요구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감동적인 위로보다는 차라리 함께 침묵하며 고통을 응시해 달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이 책은 삶의 예측 불가능성 앞에서 길을 잃은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단단한 응원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각본 없는 무대 위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고 없이 조명이 꺼지고, 외워둔 대사를 잊어버리고, 상대 배우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을 맞닥뜨릴 수 있습니다. 저자는 바로 그 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숨을 고르고, 다음 장면을 향해 한 걸음 내딛는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길을 잃고 있는 누군가에게 이 책이 다음 발걸음을 내딛는 용기를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