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의 그림자 속에서 자신의 길을 걸어간 남자
최근 IT는 온통 AI에 관한 소식으로 도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AI 영역에서 애플이 다른 기업들과 비교하여 의미 있는 성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와 함께, 애플의 미래에 대한 회의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두서없이 서가를 살펴보다가 갑자기 이 책에 눈길이 갔습니다. 애플이라는 브랜드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애플이 과거와 같은 위기를 겪지 않고 지금처럼 완성도 높은 제품들을 선보여 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일까요. 출간되었을 때, 읽어야 할 책의 목록으로 추가해 놓고 읽지는 못한 책이었기에,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스티브 잡스라는 예언자가 세상을 떠나면서, 거인의 시대가 막을 내렸습니다. 그가 남긴 텅 빈 무대를 보며 수많은 주류 매체와 온갖 미디어가 애플의 종말을 예언했습니다. 당시에는 모두가 동의하는 듯했습니다. 혁신의 아이콘이 사라진 자리에, 조용하고 숫자에 밝은 운영 전문가가 섰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관리자'라 불렀습니다. 천재의 유산을 지키기에는 역부족이라고, 빈껍데기만 남을 것이라고 수군거렸습니다. 이 책, 린더 카니의 "팀 쿡"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세상의 모든 의심과 불안을 정면으로 돌파해 온 한 남자에 대한 집요하고 상세한 기록입니다.
이 책이 보여주는 팀 쿡은 스티브 잡스의 모방자가 아닙니다. 그는 잡스가 되려고 애쓰지도 않았습니다. 잡스가 카리스마 넘치는 불꽃이었다면, 쿡은 조용히 흐르는 강물과 같았습니다. 그는 소리치지 않았습니다. 대신, 집요하게 질문했습니다. 새벽 3시 45분에 이메일을 보내고, 회의실에서는 끝없는 질문으로 문제의 본질을 파고들었습니다. 그의 무기는 직관이 아닌 데이터였고, 그의 힘은 선동이 아닌 논리였습니다.
저자 린더 카니는 애플 전문 저널리스트답게, 쿡의 이러한 '운영의 천재성'이 어떻게 파산 직전의 애플을 구했는지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7개월 만에 30일 치 재고를 단 6일 치로 줄여버린 일화는 전설과도 같습니다. 이는 단순히 창고를 비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업의 혈액순환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낭비되는 모든 에너지를 성장의 동력으로 전환시킨 외과수술에 가까웠습니다. 잡스가 영감으로 제품을 창조했다면, 쿡은 그 영감이 수억 명의 손에 가장 효율적으로 쥐어질 수 있는 시스템을 설계했습니다. 책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무엇이 더 위대한 혁신인가. 세상에 없던 것을 내놓는 것인가, 아니면 그 위대한 창조물을 모두의 현실로 만드는 것인가.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 중의 하나는 그의 리더십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추적하는 대목입니다. 앨라배마의 시골 마을, 어린 시절 목격했던 인종차별의 상처, 그리고 KKK단의 모습은 그의 영혼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웅으로 스티브 잡스가 아닌 마틴 루터 킹 주니어와 로버트 F. 케네디를 꼽습니다. 그의 사무실에는 그들의 사진이 걸려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존경의 표시가 아닙니다. 그의 경영 철학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입니다.
접근성, 교육, 환경, 포용과 다양성, 프라이버시, 공급업체 책임. 쿡이 내세운 애플의 여섯 가지 핵심 가치는 그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성 소수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공개하며 그는 말했습니다. '애플의 CEO가 게이라는 사실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면, 내 프라이버시를 희생할 가치가 있다.' 정말 강력한 선언입니다.
이 책은 팀 쿡의 성공을 조명하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합니다. 그 과정에서 ‘혁신의 속도가 더뎌진 것은 아닌가’ 하는 날카로운 비판의 목소리가 조금은 무디게 들리는 순간도 있습니다. 애플 워치와 에어팟은 분명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아이폰처럼 세상을 전복시킨 제품이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쿡의 시대에 애플은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기업이 되었지만, 잡스 시대의 '미친 존재감'은 희미해진 것이 사실입니다. 이 책은 쿡의 위대함을 설득력 있게 증명하지만, 그가 잡스의 '다음'을 완벽하게 제시했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둡니다.
이 책은 한 개인에 대한 평전이기도 하지만, 리더십의 본질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도록 이끄는 책입니다. 화려한 비전과 카리스마만이 리더의 덕목은 아니라고, 조용한 신념과 집요한 실행력이 때로는 더 큰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의 '영혼'을 만들었다면, 팀 쿡은 그 영혼이 머물 수 있는 가장 견고하고 건강한 '몸'을 만든 사람입니다.
이 책은 애플의 성공 비결이 궁금한 사람에게는 필독서입니다. 세상의 예상을 뒤엎고, 가장 시끄러운 회사를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이끌어 온 남자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펼쳐보시길 권합니다. 비즈니스를 넘어선 한 인간의 위대한 분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