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팔트에서 위태롭게 다시 세워지는 삶에 관한 기록
오늘은 저널리스트 '제시카 브루더'가 쓴 논픽션, "노마드랜드"에 관한 글입니다. 어떤 사전정보도 없이 '클로이 자오' 감독이 만든 동명의 영화를 보게 되었고, 영화가 남긴 감동과 먹먹함이 인상적이어서 책까지 찾아 읽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단단한 땅 위에 집을 짓고 살아가라 말합니다. 안정적인 직장, 예측 가능한 내일, 그것이 성공의 증거라고 속삭입니다. 하지만 2008년, 세계를 휩쓴 금융 위기는 그 단단하다 믿었던 땅을 한순간에 모래뻘로 만들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집과 일자리를 잃었죠. 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실패자로 여기며 좌절했지만 그들은 실패자가 아니었습니다. 시스템의 희생양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은 마지막 남은 자동차에 살림을 싣고 길 위로 나섭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홈리스(homeless)’가 아닌 ‘하우스리스(houseless)’라고 부릅니다. 돌아갈 집(house)은 없지만, 차가 있고 공동체가 있는 한 삶의 터전(home)을 잃지 않았다는 선언입니다. 이 미묘한 단어의 차이 속에 그들의 자존심과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책의 중심에는 ‘린다’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남편과 사별하고, 변변한 노후 자금도 없이 60대의 나이에 트레일러 생활을 시작한 여성입니다. 그녀의 여정은 이 책의 뼈대를 이룹니다. 우리는 린다의 시선을 따라 현대판 유목민, ‘노마드’의 세계로 깊숙이 들어갑니다. 그들의 삶은 낭만적인 여행이 아닙니다. 생존을 위한 처절한 분투입니다.
노마드들의 주된 일터는 놀랍게도 세계 최대의 전자상거래 기업, 아마존입니다. 아마존은 연말 쇼핑 시즌처럼 물류량이 폭증하는 시기에 노마드들을 임시 노동자로 고용하는 ‘캠퍼포스(CamperForce)’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그들은 아마존 물류창고 근처 RV 파크에 머물며 고된 노동을 감당합니다.
책이 보여주는 현실은 냉혹합니다. 하루 10시간 이상,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수만 걸음을 걸으며 물건을 스캔하고 포장합니다. 시간당 11.50달러 남짓한 임금은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기에도 벅찹니다. 한 노동자는 2주간 번 돈의 4분의 3이 의료 보험료로 나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유로운 선택이 아닙니다. 사회 안전망의 부재가 그들을 선택의 여지없는 벼랑 끝으로 내몬 결과입니다.
저자는 이 시스템의 기만성을 날카롭게 포착합니다. 기업은 이들에게 ‘유연한’ 일자리를 제공한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고령의 값싼 노동력을 착취하는 구조에 가깝습니다. '오래전부터 모든 것이 망가져 있었다'라고 체념하는 린다의 독백처럼 이 책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가장 어두운 민낯을 정직하게 응시합니다.
책의 많은 내용이 우울하고 절망적이지만, 인간적인 연대와 공동체를 통한 희망을 담담하게 그려내기도 합니다. 노마드들은 광활한 사막에 모여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생존 기술을 공유합니다. ‘루버 트램프 랑데부(Rubber Tramp Rendezvous, RTR)’ 같은 자발적인 모임은 이들에게 단순한 정보 교환의 장을 넘어, 정서적 유대와 소속감을 나누는 축제가 됩니다.
그들은 서로를 돕습니다. 차가 고장 나면 함께 고치고, 아픈 사람이 있으면 돌봅니다. '우리는 친절해', '우리는 한 가족'이라는 그들의 말에는 어떤 꾸밈도 없습니다. 각자는 완벽히 독립된 개인이지만, 필요할 때 기꺼이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줍니다.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저마다 홀로 빛나지만 멀리서 보면 하나의 거대한 별자리를 이루는 것과 같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공동체’와 ‘개인의 자율성’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얻게 됩니다.
책을 읽다 보면 한 가지 아쉬움, 혹은 더 깊은 질문이 남습니다. 이들의 강인한 생존력과 공동체 의식은 분명 감동적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 감춰진 상실의 고통과 정신적 외상은 얼마나 깊을까요? 자발적으로 길을 택한 이들과 어쩔 수 없이 내몰린 이들의 심리적 간극은 책이 섬세하게 다루고 있지만, 그 트라우마의 깊이까지는 온전히 파고들지 못한 인상도 남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저널리즘의 영역을 넘어, 독자 각자가 채워야 할 공백일지도 모릅니다
저자는 3년간 직접 밴을 타고 노마드들과 생활하며 이 기록을 완성했습니다. 그녀의 글에는 대상에 대한 뜨거운 공감과 저널리스트로서의 차가운 이성이 공존합니다. 이 책의 내용을 단순히 미국에 한정된 이야기로 치부하기는 어렵습니다. 오늘날 미국이 겪는 극심한 불평등은 러시아나 중국보다 심각한 수준이라는 통계는 충격적입니다. 이는 신자유주의가 확산된 모든 사회가 맞닥뜨릴 수 있는 미래의 초상과도 같습니다. 부동산 가격 폭등, 불안정한 고용, 붕괴하는 사회 안전망. 이 낯설지 않은 풍경 속에서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과연 ‘집’이란 무엇일까요? 성공적인 삶이란 어떤 모습일까요? 책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대신, 길 위에서의 삶을 통해 우리 스스로 현실을 숙고하고 답을 찾도록 이끌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