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가 글자를 만났을 때 벌어지는 일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의 알림을 확인하고, 거리의 표지판을 읽으며, 책 속의 문장을 통해 누군가의 생각과 만납니다. 이 모든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우리는 '읽기(Reading)'라는 행위가 얼마나 기적적인 일인지 종종 잊곤 합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부모님의 말을 듣고 따라 하며 자연스럽게 말을 배웁니다. 하지만 아무리 영리한 아이라도 가만히 놔둔다고 저절로 글을 읽지는 못합니다. 읽기는 말하기와 달리, 체계적인 교육과 부단한 노력을 통해서만 습득되는 후천적인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읽기를 거칠게 요약하면 '작은 선과 동그라미, 점들의 집합인 철자(Orthography)가 우리 눈을 통해 뇌로 들어와 소리(Phonology)와 의미(Semantics)로 변환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풀어 설명하니까, 읽기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느껴지지 않나요? 오늘은 이러한 변환 과정 속에서, 우리의 뇌가 어떻게 변화하고 적응해 나가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인간의 몸은 원래 먹고 숨 쉬기 위해 발달한 기관을 이용해 말을 하도록 진화했습니다. 뇌 또한 입과 혀의 움직임을 제어하고 소리를 처리하는 영역들을 언어 활동에 활용합니다. 반면, 우리의 뇌는 읽기를 위한 전용 회로를 따로 갖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즉, '읽기'는 진화의 역사에서 매우 최근에 등장한 발명품인 것이죠. 뇌는 기존에 시각 정보를 처리하거나 말을 듣는 데 쓰이던 영역들을 새롭게 연결하여 '읽기 회로'를 만들어냈습니다.
19세기 신경학자들은 이미 뇌의 특정 부위가 손상되었을 때 언어 능력을 잃는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브로카 영역(Inferior Frontal Gyrus, IFG)이 손상되면 말은 이해하지만 소리를 내지 못했고, 베르니케 영역(Superior Temporal Gyrus, STG)이 손상되면 유창하게 말은 하지만 의미 없는 소리를 늘어놓았습니다(Broca, 1861; Wernicke, 1874). 특히 좌측 각회(Left Angular Gyrus)는 시각 정보와 언어 정보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여, 이곳이 손상되면 글을 읽고 쓰는 능력(Alexia with Agraphia)을 잃게 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Dejerine, 1892).
우리는 어떻게 'cat'처럼 쉬운 단어와 'contradistinction'처럼 복잡한 단어를 모두 읽을 수 있을까요? 뇌과학자들은 우리 뇌 속에 두 가지 읽기 경로가 존재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를 이중 경로 모델(Dual-Route Model)이라고 합니다(after Ziegler, Perry, & Coltheart, 2000 ).
어휘적 경로(Lexical Route)
익숙한 단어를 읽을 때 사용합니다. 단어의 전체적인 생김새를 보고 철자 사전(Orthographic Lexicon)에서 바로 소리와 의미를 찾아냅니다. 빠르고 효율적인 지름길입니다.
하위 어휘적/음운적 경로(Sublexical/Phonological Route)
처음 보는 단어나 낯선 단어를 읽을 때 사용합니다. 글자를 하나하나 소리(음소)로 변환하는 자소-음소 변환(Grapheme-to-Phoneme Conversion) 규칙을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yacht(요트)'라는 단어는 철자대로 읽으면 '야치트'가 되어버립니다. 이 단어를 올바르게 읽으려면 첫 번째 경로(어휘적 경로)를 통해 통째로 기억된 발음을 꺼내야 합니다. 반면, 처음 보는 단어를 읽을 때는 두 번째 경로를 가동해 소릿값을 조합해야 하죠(Rastle & Coltheart, 2000). 우리의 뇌는 이 두 경로를 쉴 새 없이 오가며 책을 읽어 내려갑니다. 즉, 시각과 청각, 나아가 추상적인 인지 능력까지 모두 사용하는 일이 '읽기'인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아이들에게는 이 과정이 너무나 험난합니다. 지능이나 시력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에도 글을 읽는 데 어려움을 겪는 발달성 난독증(Developmental Dyslexia) 이야기입니다. 난독증은 전 세계 인구의 약 5~17.5%가 겪고 있는 흔한 증상입니다(Shaywitz, 1998).
난독증의 원인은 다양하지만, 가장 지배적인 이론은 음운 결함 가설(Phonological Deficit Hypothesis)입니다. 말소리를 머릿속에 저장하고 불러오는 능력에 어려움이 있어, 글자(Grapheme)와 소리(Phoneme)를 연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Snowling, 2000).
실제로 난독증 아이들의 뇌를 촬영해보면, 일반 아이들과 다른 패턴이 관찰됩니다. 글을 읽을 때 좌측 후방 뇌 영역(Left Posterior Regions), 즉 베르니케 영역이나 각회 등의 활성도가 현저히 낮게 나타납니다. 대신 이 아이들은 부족한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우측 뇌(Right Hemisphere)나 전두엽(Frontal Lobe)을 더 많이 사용하는 경향을 보입니다(Shaywitz et al., 2002).
그렇다면 난독증은 영원히 고칠 수 없는 걸까요? 많은 분들이 한번쯤은 들어보셨겠지만, 다행히 우리의 뇌는 놀라운 가소성(Plasticity)을 가지고 있습니다.
Shaywitz 연구팀(2004)은 난독증 아이들에게 8개월간 집중적인 음운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훈련을 받은 아이들의 뇌에서 난독증의 특징이었던 비효율적인 활성 패턴이 사라지고, 일반 아이들처럼 좌측 하전두회(Left Inferior Frontal Gyrus)와 후방 중측두회(Posterior Middle Temporal Gyrus)가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읽기 기술을 익힌 것을 넘어, 뇌의 물리적인 연결망 자체가 '숙련된 독자'의 형태로 재배선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적절한 개입과 교육이 있다면, 아이들의 뇌는 분명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난독증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탈리아어나 스페인어처럼 글자와 소리가 1:1로 매칭되는 투명한 철자법(Transparent Orthography)을 가진 언어권에서는 난독증 아이들도 글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읽는 속도가 매우 느릴 뿐이죠. 반면, 영어처럼 글자와 소리의 규칙이 복잡한 불투명한 철자법(Opaque Orthography)을 가진 언어권에서는 읽기 속도뿐만 아니라 정확성 자체에서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렇다면 한글은 어떨까요? 한글은 기본적으로 자음과 모음이 결합하여 소리를 내는 표음 문자이며, 각 자모음의 소릿값이 매우 규칙적입니다. 따라서 영어처럼 'a'가 단어마다 다르게 발음되는(예: cat, car, cake) 불투명한 언어와 달리, 투명한 언어에 훨씬 가깝습니다. 그러니 난독증을 고칠 가능성도 영어권 학습자보다는 더 높다고 짐작할 수 있겠죠.
뇌영상 기술은 이제 단순히 뇌의 구조를 보는 것을 넘어, 어떤 아이가 미래에 읽기 능력이 향상될지 예측하는 신경 예후(Neuroprognosis)의 단계까지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난독증 아이나 읽기 발달이 느린 아이를 향한 따뜻한 시선이 아닐까 합니다. 글을 읽지 못해 쩔쩔매는 아이의 뇌 속에서는, 지금 보이지 않는 우회로를 만들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 일어나고 있을지 모릅니다(앞서 살펴봤듯이, 실제로 난독증 아이들은 뇌의 다른 영역을 이용해 읽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글자를 읽는다는 것, 그것은 뇌가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발명품일 것입니다. 그러니 읽기는 '기적'이라고 할 수 있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순간에도 그러한 기적이 끊임없이 탄생하고 있음을, 그리고 읽기 발달이 느린 아이들을 향해서도 그런 시선을 놓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Broca, P. (1861/1965). Remarques sur le siege de la faculté suivie d’une observation d’aphémie. In R. Herrnstein & E. G. Boring (Eds.), A source book in the history of psychology (p. 330).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Coltheart, M., & Rastle, K. (1994). Serial processing in reading aloud: Evidence for dual-route models of reading. Journal of Experimental Psychology: Human Perception and Performance, 20(6), 1197-1211.
Dejerine, J. J. (1892). Contribution a l’étudeanatomoclinique el clinique des diferentes variétés de cecite verbal. Memoires De La Société De Biologie, 4, 61-90.
Rastle, K., & Coltheart, M. (2000). Lexical and nonlexical print-to-sound translation of disyllabic words and nonwords. Journal of Memory and Language, 42, 342-364.
Shaywitz, B. A., Shaywitz, S. E., Blachman, B. A., Pugh, K. R., Fulbright, R. K., Skudlarski, P., Mencl, W. E., Constable, R. T., Holahan, J. M., Marchione, K. E., Fletcher, J. M., Lyon, G. R., & Gore, J. C. (2004). Development of left occipitotemporal systems for skilled reading in children after a phonologically-based intervention. Biological Psychiatry, 55(9), 926-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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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ywitz, S. (1998). Current concepts: Dyslexia. The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338, 307-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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